酒國憲法
余가 一般麴民의 飮福을 增進하고 麴價의 隆昌를 圖하며 世界平和를 永遠 維持하기 爲하야 玆에 酒國憲法을 發布하노라.
酒降生 一千九百二十九年 二月 一日
大酒國 賤者 御題
麴務 各 大臣 署名
一. 이 憲法에 違反하는 者는 一年間禁酒國에 流配함.
一. 이 憲法은 發布日부터 施行함.
第一條
酒國은 一般麴民으로 永遠維持함.
第二條
酒國은 領土는 全世界로 하되 米國과 가튼 禁酒國은 特別食民地로 함.
第三條
酒國은 天子, 大將이 無함(醉中無大子, 酒無大將이라는 由來語에 依하야)
第四條
心身에 故障이 잇는 者, 未成年男女, 基督敎信者는 酒國에 入籍을 不許함.
第五條
酒國의 國都는 鐵甕城으로 定함.
第六條
三盃以上을 먹을 資格이 있는 者로 酒國에 稅金(酒代)을 納入한 者는 누구나 酒權 者가 됨.
第七條
酒國에 入籍한 者는 그 程度如何를 따라서 酒天子, 酒大統領, 酒大將, 酒검知, 모주 兵丁, 알코올博士, 酒 太白等榮位, 雅號를 與함.
第八條
酒國의 爵位는 空, 厚, 百, 自, 濫五等으로 하야 술잔을 잘 비도록 먹는 사람은 空 酌, 큰 잔으로 두둑히 먹는 사람은 厚酌, 百盃를 能히 먹는 사람은 百酌, 자기손으 로 부어 먹는 사람은 自酌, 함부로 부어 먹는 사람을 濫酌 이라 稱함.
第九條
麴民은 蒸甁(술병)의 義務가 有함.
第十條
麴民은 남의 술을 먹고 반듯이 報償할 義務가 有함.
第十一條
술의 盃數는 酒不護盃의 原則에 依하야 반듯이 寄數로 하되 一不若, 三小, 五宜, 七可, 九足으로 하고 此以上은 麴民의 體質, 金力, 嗜好에 依하야 自由放任함.
第十二條
飮酒의 適宜한 時期는 左如히 定함.
一, 千里他鄕逢友時
二, 斜風細雨夕陽天
三, 旅館寒燈無聊時
四, 月白雪百夜
五, 花開葉落時
六, 憂露悲哀時
七, 痛快興奮時
(但, 飯酒及解 은 隨時實行함)
第十三條
사람이 술을 먹되 술이 사람을 먹지 안케할 事.
第十四條
수염이 만흔 사람은 잔을 畢한 때마다 반듯이 手巾으로 口頭大淸潔할事.
第十五條
愛人이 있는 사람은 酒後에 반듯이 양치를 잘하고 「키스」할 事.
第十六條
술을 붓지 않는 사람은 不傾罪에 處함.
第十七條
술을 혼자 密賣飮한 者는 無期로 共同酒會에 參加를 不許함. 但 改悛의 事가 잇 는 때에는 酌量 輕함을 得함.
第十八條
술을 먹은 뒤에 言爭, 決鬪를 하야 酒國의 公安을 妨害하거나 拒逆을 하야 公衆 衛生을 妨害케 하는 者 는 卽時 酒會席에서 退場을 命함.
第十九條
酒會에 遲參한 者는 後來者 三盃란 慣習法에 依하야 處罰함.
但, 特殊地方에 施行하는 所謂 谷山사돈목이法은 너무 苛酷함으로 本法發布日로부터 廢止 함.
(谷山에서는 後來者에게 座客마다 三盃 씩을 주는 일이 있다.)
第二十條
酒後에 노래나 춤 其他작란을 잘하는 者는 大盃를 賞與함.
第二十一條
左記에 害黨하는 者는 酒國의 十不出로 認함.
一, 술 잘 안 먹고 안주만 먹는 者
二, 남의 술에 제 生色내는 者
三, 술잔잡고 잔소리만 하는 者
四, 술 먹다가 딴 座席에 가는 者
五, 술 먹고 따를 줄 몰으는 者
六, 喪家집 술 먹고 노래하는 者
七, 잔치집 술 먹고 우는 者
八, 남의 술만 먹고 제술안내는 者
九, 남의 酒席에 제 친구 다리고 가는 者
十, 宴會酒席에서 祝辭 오래 하는 者
第二十二條
麴民黨員의 步法은 之字 或은 玄字式으로 하야도 無妨하되 公衆交通을 妨害치 말사.
第二十三條
酒國麴民의 帽子는 左傾하야도 特別히 取締치 안이함.
第二十四條
酒國麴民의 顔面은 赤化하여도 取締치 안이함
第二十五條
麴民黨員은 少하야도 懷中에 一金五十錢也를 準備함이 加함. (小便濫方의 科 料處罰을 當하기가 쉬우닛가.)
第二十六條
酒國麴民은 敎養의 必要上長進酒, 飮中八仙歌, 酒德頌 等을 一日一回식 朗讚할 事.
第二十七條
酒者는 伐性之狂藥也라는넷 解釋을곳치여서 酒者는 伐性之狂하니 藥也라해하되 此를 不準하는 者 는 斯門亂賊으로 認함.
第二十八條
酒國의 政黨은 麴民黨麴水黨以外에 他黨의 設置를 不許함.
第二十九條
本法은 麴民黨員의 多數決議가 안이면 變更함을 不得함.
(법률조항이기 때문에 원문에 있는 그대로 띄어쓰기, 한자, 맞춤법은 인용하였음.)
* 출처 : 別乾坤. 19호. 1929.
* 작성자 : 청오 차상찬
* 참고자료 : 알코올의 야누스적 문화, 남태우, 창조문화,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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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잡지언론계의 선구자 -
노암(蘆菴) 차상찬(車相瓚)
신인간편집위원 이동초
다음 글은 1946년 3월 24일 노암(蘆菴) 차상찬(車相瓚)의 영결식에서 개벽사 동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인에게 보낸 조사의 한 구절이다.
"선생의 일생은 우리의 가난하고 힘없는 조국과 함께 파란과 고난이 중첩한 민족 문화상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제 선생께서 그렇게도 오매불망으로 염원하시던 조국의 광복사업은 비로소 자유와 광명의 첫 봄을 맞이하려하거든 선생은 어찌하여 이 위대한 역사적 단계인 사명을 그대로 남겨 두시고 영원히 가시나이까? 조국은 정(正)히 선생과 같으신 고결한 지조, 변함이 없는 성충(誠忠), 순결한 조국애, 예리한 필봉(筆鋒), 명철한 이론과 실천의 前衛鬪士를 求함이 크거늘 선생은 이 모든 임무를 그대로 남겨 두시고 저 生으로 떠나셨습니까? 실로 백만 인구의 수도 한성이 텅 비인 듯한 느낌이 용솟음치나이다."
천도교인으로 한국 잡지언론계의 선구자인 차상찬은 아호를 청오(靑吾), 도호는 노암(蘆菴)으로 천도교 도사와 종법사, 청년회 중앙간사와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교회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단 내에서는 개벽사의 주간으로 활동한 인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한국의 100년 잡지언론사에 큰 자취를 남긴 차상찬은 국운이 기울던 1887년 2월 12일 강원도춘성군신동면송암리에서 성균진사(成均進士) 차두영(車斗永)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 때에는 상학(相鶴), 상준(相俊)의 두 형과 함께 진보회에 가입하여 천도교의 갑진개화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1910.8∼1918.8.)이었던 셋째형 향산(香山) 상학과 함께 평생을 천도교에 몸담게 된다.
1910년에 23세의 늦은 나이로 보성고보를 졸업(1회)하고, 1912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6회)한 후 모교에서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또한 1910년 9월부터는『천도교회월보』학술부란에「無機化學」을 연재(6회)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20년 창간된『개벽』지의 동인으로 참여하여『개벽』이 폐간될 때까지 기자·편집주간·발행인등을 맡으면서 개벽사를 이끌어 나갔다.
개벽사에서는『부인』(1921.6∼1922.)·『신여성』(1923.3∼1934.4)·『어린이』(1923.3∼1934.7)·『조선농민』(1923.10∼1931.7)·『別乾坤』(1926.11∼1934.3)·『학생』(1929.3∼1930.11)·『혜성』(1931.3∼1932.3) 등의 잡지도 발행하였는데, 차상찬은 편집기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잡지를 통해 사화(史話)·인물만평(人物漫評)·사회풍자(社會諷刺)·만필(漫筆)·소화(笑話)·민속설화(民俗說話)등 410편에 달하는 다양한 글을 발표하였다. 차상찬이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가는 그의 필명이 22여 개에 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필명이 많은 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한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쓰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용한 필명은 청오(靑吾)를 비롯해서 수춘산인(壽春山人)·명월산인(月明山人)·삼각산인(三角山人)·취서산인(鷲棲山人)·취운생(翠雲生)·강촌생(江村生)·관상자(觀相者)·사외산인(史外山人)·차기생(車記生)·차부자(車夫子)·차천자(車賤子)·주천자(酒賤子)·풍류랑(風流郞)·고고생(考古生)·문외한(門內漢)·방청생(傍聽生)·독두박사(禿頭博士)·차돌이·각살이·가회동인(嘉會洞人)등이었는데, 이런 필명을 모르고서는 차상찬의 다양한 글들을 알 수가 없다.
1920년 신문지법·출판법에 의해 창간된『개벽』은 우리나라의 언론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종합잡지로 판매금지 34회, 정간 1회, 발행금지 1회 등의 일제탄압을 받다가 1926년 8월 1일 총독 사이토(齋藤實)는 안녕 질서를 방해함으로 신문지법 제21조에 의거 발행을 금지한다는 지령을 내려『개벽』은 통권 제72호로 폐간 당하였다. 이 때 일제는 개벽지를 모두 수레에 싣고 가서 한 권씩을 작두질을 하였는데 차상찬은 개벽지를 싣고 가는 수레에 매달려 엉엉 울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1927년 7월에『別乾坤』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영어교수인 백상규(白象圭)의 인물평에 대한 필화사건으로 방정환과 함께 피검이 되기도 하지만 개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차상찬은 1934년 11월에 사재를 털어『개벽』을 속간하였으나 일제탄압과 재정여건이 어려워 속간 4호만을 남긴 채 다시 폐간하고 말았다.『개벽』은 천도교청년회의 편집부 사업으로 추진되어 차상찬·민영순·이돈화·이두성·김기전·박달성 등의 창간 동인들에 의해 편집활동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개벽사의 경영은 차상찬과 일본에서 귀국한 방정환이 하였는데, 1931년 방정환이 33세로 요절한 후에는 차상찬이 혼자 떠맡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개벽』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였다.
한때 개벽사에 근무했던 극작가인 박진(朴珍.1906∼1974)은 수필집『世世年年』에서 차상찬에 대한 글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이어서 원고만 쓰는 청오였다. 역사에 있어서는 뉘에게도 뒤지지 않는 청오였고, 인물만평·사회풍자·재치가 있는 잡종기사를 두루 쓰니 개벽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그의 글이안 실리는 데가 없고 안 실리는 호가 없었다. 그리고도 신문과 다른 잡지에 완성하게도 글을 썼다.‥‥‥소파가 기둥이라면 청오는 들보였고, 청오가 기둥이라면 소파는 들보로 이 두 사람이 없이는 개벽사가 서있을 수가 없었다"
1933년부터 개벽사에서 근무하면서『어린이』발간을 주간하였던 아동문학가 윤석중은『大韓日報』「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차상찬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어렵게 개벽을 이끌어 가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개벽사를 이끌어 나가던 차상찬은 하루 하루가 '조마조마'였다. 검열에 걸릴까봐 조마조마, 출두하라는 전화가 걸려 올까봐 조마조마, 비행을 들춘 기사에 말썽이 붙을까봐 조마조마, 빚쟁이 나타날까봐 조마조마, 병날까봐 조마조마,‥‥‥이런 초조를 풀어주는 곳은 선술집 밖에는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는 것이다.‥‥‥1934년 차상찬이 혼자서「개벽」을 속간하여 4호까지 낸 바가 있으나 혹독한 검열로 '이빨이 없는 사자'밖에 못되었다. 비바람 속에 15성상을 묵묵히 지켜온 차상찬은 가산을 탕진한 채‥‥‥우리 잡지 계의 숨은 희생자인 그를 아는 이는 드물다."
또한 만화가로 잡지편집자이며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崔永秀(1909∼납북)는 1947년 4월에 펴낸 수필집『困憊(곤비)의 書(서)』「靑吾 先生」에서 차상찬의 빈한한 생활 속의 면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선생의 애는 사업과 생활에 있어 함께 빈한하였다. 담배 한 갑을 못 사 피우면서도 개벽사 외따른 방구석에서 물 뿌리를 깨물어 뜯으며 일을 하였다. 선생이 조선의 잡지에서 불후의 이름을 남기기까지의 노력은 인위(人爲)의 경지(境地)를 떠난 것이다. 현 문단의 수많은 작가가 개벽사를 거쳐 나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靑吾선생의 운영자재(運營自在)한 그 실력의 가치를 넉넉히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생활 또한 그러하였다. 선생은 오로지 안빈(安貧)하는 철학 속에서 살았다.‥‥‥"
차상찬은 1922년 방정환·김기전 등과 함께 어린이운동에도 참여하여 '어린이 날'을 제정하고 천도교회 소년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또 1921년 11월 27일에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단체인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여 기자로서 뿐만 아니라 항일 언론인로 활약하였다. 1923년 9월 동경의 대진재(大震災) 이후 조선노동자의 입국을 금지시키자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강연을 개최하려 하였으나 일제가 무조건 금지시켰다. 두 단체는 전국적인 여론을 일으켜 일제의 언론탄압을 규탄 투쟁할 것을 계획하여 1924년 6월 7일 무명회·시대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 등 언론계를 비롯한 31개 사회단체의 대표 1백여 명이 모여 결성한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서 실행위원(徐廷禧·韓愼敎·李鐘麟·安在鴻·尹洪烈·李鳳洙·車相瓚·金炳魯·金弼秀·申明均·李仁·金鳳國)으로 선출되어 항일언론투쟁 운동에도 활약하였다.
또한 1925년 3월 15일 무명회에서 주관하여 신문·잡지 기자로 결성된 '全朝鮮記者大會準備委員會'에서는 김기전·송진우·안재홍·조봉암 등 34명으로 구성된 서무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기자대회준비회의 사무실을 개벽사 내에 두었고 집행위원장이 천도교의 이종린이었기 때문에 차상찬은 준비를 위한 실무를 주도적으로 담당하였다. 4월 15일부터 3일간 '죽어 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열린 초유의 '전조선기자대회'에서는 朴昌漢·呂海·金炳淵과 함께 대회 서기로 선출되어 우리나라 언론신장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1년 조선잡지협회의 창립위원으로 활약하여 우리나라의 잡지언론사에 크게 공헌하였고, 1936년 조선어학회의 '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서 천도교회에서 참가한 이종린·조기간·공탁 등과 함께 한글운동에도 이바지하였고, 경성방송국(JODK)의 방송위원으로 야사(野史)와 민담(民譚)을 방송하였다.
『개벽』이 없는 세월에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에는 저술에 전념하여 1937년 잡지『野談』에는「野史와 民譚」을, 1938년 일간지『朝鮮中央日報』에는 역사소설「장희빈」을 집필 연재하였다. 또 1939년 조선일보의 출판부에서「朝鮮名人傳」을집필하는 한편『每日申報』에는「징기스칸」을 연재하는 등 왕성한 문필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던 그는 왜놈이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되었으나 이듬해 신병으로 환원하니 향년 59세였다.
주요 단행본 저서로는 조선의 역사를 正史보다는 裏面史와 秘史를 중심으로「朝鮮七大內亂記」「朝鮮二大政變記」「東方三大國創建記」「朝鮮最初外國公使行」「景福宮建築秘錄」「朝鮮海軍秘錄」「張禧嬪哀話」「思悼世子哀話」「新解鄭鑑錄」등과 부록으로「歷代人物列傳」을 편술한『通俗 朝鮮四千年秘史』(北星堂書店. 1934. 10. 5)가 있으며, 후비(后妃)·왕녀(女王)·공주(公主)·궁녀(宮人)·명부인(名夫人)·명첩(名妾)·열녀효녀(烈女孝女)·투부(妬婦)·추부(醜夫)·명기(名技)등 여성들에 관한 전설·민요·괴담·만담·희담(戱談)을 발취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엮은『海東艶史』(漢城圖書.1937.12.20)가 있다.『해동염사』의 서문에는 "남자 본위로 조직된 재래사회에는 역사의 붓을 잡는 사람까지도 모두 남자뿐이기 때문에 여자의 역사는 거의 불문에 붙여져 매몰되고 말았다"고 전제하고 "여자들에 관한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하나의 책으로 엮는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遺稿集으로 李浩雲(목원대 초대학장)에 의해 출간된『朝鮮史外史』(明星社. 1947.5.20)는 우리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다룬 민속학총서로 평가되고 있으며, 1942년에 출판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출판이 금지된『朝鮮百話集』은 조선의 옛 制度·명절과 행사·인물열전·역시전(力士傳 )·名醫列傳·生六臣傳·역대명인물관상·역사인물1인1화집·不遇詩人列傳·誌上漫遊·명고적명승지·팔도28폭포·寶劍·花草鳥獸類名産地 등의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리고 1959년 출간된「韓國野談實話全集」(東國文化社.1959.10.5)이 있다.
특히 육필원고·관련잡지·사진·서한 등 다수의 유품은 2002년 3월 21일에 개관한 한국잡지정보관(여의도)에 영구 보전되고 있으며, 독립기념관에는 천도교·개벽사의 관련자료 18점이 전시되고 있다.
【참고자료】
①車相瓚「無機化學」學術部『天道敎會月報』1910.9.315∼1911.2.15
②車相瓚『通俗 朝鮮四千秘史』北星堂書店 1934.10.5 ※井邑東學農民革命記念館(유물지정)
③車相瓚『海東艶事』한성도서. 1937.12.20
④잡지언론의 선각자-차상찬『月刊 中央』1974년 3월호
⑤鄭晉錫「言論團體의 抗日鬪爭」『日帝下 韓國言論鬪爭史』正音社 1974.6.20
⑥잊혀진 별-「靑吾 車相瓚 先生」『江原日報』편집부 1982년
* 출처 : http://blog.naver.com/simahm/4001176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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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吾 車相瓚과 綜合雜誌 "開闢"(上)
<筆者註> 이 글은 포덕 147(2006)년 4월 28일
이 發題文의 내용이 매우 길어(200자 원고지 약 200매 정도) 청오 차상찬의 생애와 작품을 통한 평가를 다룬 前半部만 천도교 홈의 자유게시판과 각 교구 홈에 게재하고, '종합잡지 개벽은 어떤 잡지인가' 라는 후반내용과 본 발제문에 인용하고 분석한 많은참고문헌 해설과 訓菴 車雄烈 선생이 수집하여 제공한 1 차 자료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의 필자가 수정 보완한 청오 선생 年譜와 硏究資料 文獻目錄을 揭載한 全 文章을 吾菴 東學思想 硏究所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개방된 사이트인
본래 연보와 연구문헌 목록자료의 정리는, 금년 말에 출간 예정인 청오 차상찬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논문과 청오의 文才와 筆力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청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選定된 10여 편의 글과 함께, 청오 선생 환원이후 최초로 정리하여 출간될 (가명)"청오 차상찬 연구" 란 신간 책 末尾에 싣기 위하여, 완벽하게 확인 정리 작성된 것을, 책이 출간되기 전에. 처음으로 이 글 뒤에 첨가하여 발표합니다
<添記> 靑吾車相瓚 선생의 60주기 행사는 반드시 우리 교단이 해야 했다. 우리는 다 잊고 있는데, 밖에 사람들이 알아 청오선생의 思想과 삶을 宣揚한다고 하니 매우 부끄럽다. 청오가 還元한 지 벌써 60週忌를 맞게 되었고, 또 올해가 靑吾와 같은 名門敎人家(천도교 회월보의 2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형 차상학과, 상준, 사돈인 개벽 창간 동인이며 인쇄인
靑吾家와 같이 천도교에 至大한 貢獻을 한 名門敎家의 表彰과 宣揚은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동학창도 140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교단에 赫赫한 공로를 세운 중요한 교역자의 후손들이 한, 두 代로서 신앙이 무너져 천도교를 떠나는 실정에서 더더욱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있고, 매우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逆境 속에서, 항상 그 중심에 서서 萬難을 避하지 않고 酷毒한 試鍊을 心身을 다 받쳐 堪耐하면서 교단을 이끌어 온, 동학과 천도교단에 공헌한 선배 동덕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고마워하고, 그들이 목숨을 草芥같이 던져 가며 보여준 천도교에 대한 남다른 愛情과 信仰心을 얼마나 본 받을 수 있을까 自問하면서 돌아보고, 천도교에 대해 말하고, 신심을 키울까? 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이러한 분들을 연구하는 사람이 교단에는 없다는 것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게 한다.
靑吾 車相瓚과 綜合雜誌 "開闢"
金 用 天
吾菴 東學思想 硏究所 代表
1. 청오 차상찬의 삶과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
청오(道號는 蘆菴) 차상찬 선생에 대한 연구 내지 소개한 글 약 50여 편 중, 한 두 편을 제외하고는 개벽을 중심으로 한, 동시대의 인물들의 회고담과 단편적인 일화의 소개에 끝이고 있다 아직 언론인으로서의 청오, 그가 남긴 글 속에 담겨있는 청오의 사상과 청오문학의 구체적인 분석 평가의 연구는 미흡한 형편이다. 雅號인 靑吾의 의미는 맑고 깨끗한 나, 싱싱한 나, 獨也靑靑 등의 의미를 가진 말로 알려졌으며 20대 때부터 썼다고 한다.
일제시대 초창기에 <가장 악질적인 잡지>로 불려졌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악질적으로 작두질해버린 "開闢"을 생각할 때마다, 이 선구적 잡지에 종사한 선인들의 의지를 되새기게 된다. 개벽 하면 우선 창간 동인의 한 사람이었던 차상찬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개벽의 고난의 역사를 돌아볼 때 차상찬은 개벽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차상찬은
1920년(33세) ' 開闢'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여 폐간 때까지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개벽창간 동인은 이돈화, 박달성,
차상찬은 1923년 2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개벽사의 집필진이 전국 각도를 답사하면서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취재할 때에, 특히 壯快한 筆致로 文才를 드러냈다. 해박한 지식과 유머러스한 표현 그리고 개벽이 갖고 있는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었다. 청오와 개벽사를 말할 때 둘이 아니오 하나라 했다. 청오와 개벽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잡지 뉴스/1997년 9월호에 게재된, 잡지 100년/흘러간 잡지-잡지인 이야기 <4>.최덕교(출판인 창조사 대표)가 쓴 "일제와 싸운, 큰 잡지 <개벽>"에 소개된 이야기 중에
개벽사가 간행한 수 많은 잡지에 관여한 청오를 잘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논의된 청오에 대한 공통된 평가는. 일제시대에 있어서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잡지인 한 사람을 내세운다면, 전설적인 인물로, 차상찬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세평이라는 점과 차상찬이 목이 달아나면 달아났지 그에게서 바른 말을 없앨 수 없다"는 청오의 강건한 성격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일제 식민지시대 억눌리며, 짓밟히며 살던 조선 사람들은 하고싶은 말 한마디하지 못하던 그런 세상인데 "直言, 直筆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차상찬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윗 글은 필자가 요약한 것임.
개벽사에 근무했던 극작가 朴 珍은 그의 수필집 <歲歲年年. 1966년, 동화출판사>에서 당대의 제 일인자로 차상찬을 추억하면서
"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이어서 원고만 쓰던 청오였다. 역사에 있어서는 뉘게도 뒤지지 않는 청오였고, 인물만평, 사회풍자, 재치있는 잡종기사, 훗두루 쓰니 개벽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그의 글이 안 실리는 호가 없었다. 그러고도 신문과 다른 잡지에 왕성하게 글을 썼다.-중략- 소파가 기둥이라면 청오는 들보였고, 청오가 기둥이라면 소파가 들보였다. 이 두 사람이 없이는 개벽사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라고 회고하고 있었다
만화가요 잡지편집자인
"선생의 생애는 사업과 생활에 있어 함께 貧寒했다. 담배 한 갑 못 사 피우면서도 개벽사 외따른 방구석에서 물뿌리를 깨물어 뜯으며 일을 하셨다. 선생이 조선의 잡지계에서 不朽의 이름을 남기기까지의 그 노력은 人爲의 경지를 떠난 것이었다. 현 문단의 수많은 작가가 개벽사를 거쳐 나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청오 선생의 運營自在한 그 실력의 가치를 넉넉히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선생은 오로지 安貧하는 철학 속에서 살았다."-이하 생략.
1933년부터 개벽사에서 <어린이>를 주간했던 원로 아동문학가
"개벽사를 이끌어 나가던 청오 차상찬은 하루 하루가 '조마조마'였다. 검열에 걸릴까봐 조마조마, 출두하라는 전화가 걸려 올까봐 조마조마, 비행을 둘춘 기사에 말썽이 붙을까봐 조마조마, 빚장이 나타날까봐 조마조마, 병날까봐 조마조마....이런 초조를 풀어주는 곳은 선술집밖에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저절로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 청오의 호담장쾌하고 해학적인 글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하고 놀림감이 되는 술과, 대머리, 뚱뚱보란 소재를 다루어,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심정적인 태도를 기발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酒國憲法'(別乾坤. 19호. 1929.)과 '대머리(禿頭)철학강좌'(第一線 2권 6호. 1932.)와 '뚱뚱보 철학'(別乾坤. 8권 10호. 1933.)이다. 청오 자신이 술 잘하고, 대머리이고, 뚱뚱보였기 때문에 절실하고 실감나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酒國憲法'(別乾坤. 19호. 1929.)
余가 일반 麴民의 飮福을 增進하고 麴家의 隆昌을 圖하며 세계평화를 영원 유지하기 위하여 玆에 주국헌법을 발포하노라.
酒降生
大酒國賤者 御題
麴務各 大臣 署名
1. 이 헌법에 위반되는 자는 1 년간 禁酒國이 유배함.
1. 이 헌법은 발표일로부터 시행함.
이상의 헌법 전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총 29조로 된 매우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이다. 주국의 영토와 조직과 지위의 명칭, 주국의 麴民이 될 수 없는 자의 명시(심신의 고장이 있는 자. 미성년자. 기독교인 등)와 酒國 입적의 불허. 國都의 지정(鐵甕城), 국민의 의무사항과, 음주의 양을 체질과 금력과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음주의 적절한 시기를 7가지로 분류하고, 음주의 예의와 금지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처벌의 양도 정했다. 21조에서 음주 행태의 꼴불견을 적시하여 十不出로 정하였으며 주국의 정당은 麴民黨, 麴水黨, 이외 타당은 불허한다고 했다. 끝으로 부칙에 해당하는 29조에는 본 법은 麴民黨員의 다수의 결의가 아니면 변경함을 부득함. 이라 하여 이 법의 개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대머리(禿頭)철학강좌'(第一線 2권 6호. 1932.)
대머리 대학 하기 강좌 란 부제가 붙은 글로 총 5 강좌로 되어 있다. 제 1강좌는 대머리의 10 대 공덕이란 주제로 다중이 모인 곳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어 대접받을 수 있어 상등의 머리라 했고, 이발소에 가면 요금 인하 요구권이 있으며 완전 대머리가 되면 이발소에 갈 필요가 없다, 또 머리에 이나 비듬이 끼지 않으며, 여름엔 시원하고, 필요한 때 변장하기가 편리하여 여러 종류의 사람으로 변장하여 도피하기 쉽고, 등등의 열 가지 덕을 나열했고, 제 2 장은 대머리의 5 대 위험이라 하여 방정맞은 여자가 잠결에 다듬이 돌로 알고 방망이로 때리면 위험하고, 제주에 가서 망건, 갓골, 탕건을 훔쳐갈 사람으로 오해 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고, 어린이와 잠잘 때, 요강으로 잘못 알아 오즘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등등의 피해를 입을 경우 등을 나열했고, 제 3 강은 대머리의 별명과 분류로 정하고 1종, 완전 대머리(全禿頭), 2종, 빛나는 대머리(光輝性禿頭), 3종, 일시성 불완전 대머리
'뚱뚱보 철학'(別乾坤. 8권 10호. 1933.)
픽 笑笑는 대 금물, 뚱뚱이의 의의와 雅號, 역대 뚱뚱보의 名人名色, 뚱뚱보의 非常時이란 네 개의 소 제목으로 나누어, 첫째로 뚱뚱보를 보고 돼지=픽, 피그, 라고 웃는 것은 대 금물이라 했다. 둘째로 털보는 털털보, 곰보는 곰곰보, 난쟁이는 난난이, 키큰 사람을 키다리하고 키키라 하지 않는 데 뚱보는 애 뚱뚱보라 할까. 걸음이 뒤뚱뒤뚱해서, 급할 때 행동이 느려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다고 해서, 속이 의뭉스럽고 엉뚱해서, 살이 쪄서 키가 짧뚱해서, 말이 적고 뚱해서, 배가 뚱뚱 소리가 나 북소리 같아서, 뚱뚱보라 한다고 했다. 뚱보는 그 생김새로 인하여, 절구통, 채독, 데부짱, 다루마, 스모도리, 코끼리, 하마, 양도야지 은진미륵, 또는 땅차라는 별명이 있다. 라 했다. 그리고 역사서에 나오는 똥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끝으로 뚱뚱보로 인한 여러 비상사태를 열거하여 주의하자고 했다.
1924년(37세) 일제의 언론 탄압에 맞서 無明會를 비롯한 한국언론단체와 조선청년동맹를 비롯한 31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6월 7일에 결성한 언론집회 압박 탄핵회를 결성하고 실행위원을 맡아 6월 20일 대회를 강행하다 실행위원
그는 개벽 (1920.6.-1926.8.)에서뿐만 아니라 개벽사에서 발행한
부인-1922. 6월 1일에창간, 1923. 8월호로 폐간.-통권 14호.
신여성-1923년 9월에 창간, 1934년 8월호로 폐간.-통권 38호.
어린이-1923. 3월 20일에 창간. 1934. 7월호로 폐간되었지만-통권 122호, 해방 후 복간되어 15호(1948.5.-1949. 12.)를 간행하여 총 137권이 된다.
조선농민-
별건곤-
학생-1929. 3월 1일에 창간. 1930. 11월호로 폐간.-통권18호.
혜성-
제일선-
등을 발간했다. 청오는 위의 출판물에 주간, 편집인, 발행인을 맡아 그 공로가 지대하였다. 이외에도 천도교는 다양한 출판물이 계속 간행됐다.
신경제-1932년 5월에 차상찬이 발행인으로 창간, 창간호 200만 부를 인쇄하여, 개벽사의 4대 잡지(별건곤, 제일선, 신여성, 어린이 등을 말함.) 와 "농민" 애독자에게 홍보용으로 무료 배부하였다. 이 신문의 내용과 성격은
농민-
이외로 천도교 출판한 것을 살펴보면
1. 萬歲報-天道敎의 機關紙 성격을 가진 日刊新聞으로
신문의 구독료로 월 20전을 받던 것을, 11월부터 8면으로 대폭 增面하고 월 30전, 1년 先納 3원으로 인상했다. 구독료도 징수하고, 고종으로부터 內帑金으로 1 천 원까지 下賜받기도 하고, 천도교의 재정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이 심하여 제 293호로
2. 천도교회월보-
3. 천도교 청년회 회보- 3.1운동을 주도한 후유증으로 교단의 지도자들 대다수가 수감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전국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앞장 서
4. 신인간- 교화 목적으로 출간된 천도교 기관지로 1926. 4월 1일에 창간하여 현재 통권 668호(2006. 4월호 현재.)로 계속 간행하고 있다.
5. 黨聲과 黨友-天道敎 靑年會가
6. 東學之光-청년당 일본 동경 당부 주관하여 기관지로
7. 衆聲-
8, 새벗- 구파 새벗사에서
9. 前線- 黨友를 改題하여 전선으로 1933년 1월부터 구파 천도교 청년동맹 명의로 간행됐다가 1937년 5월 휴간공고 후 간행여부와 총 발행 호수는 알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은 한국 근, 현대사의 출판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세계 역사상 강대국에 의한 수많은 식민지 국가가 있었지만 한국과 같은 혹독한 일제 식민지시대에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과 같은 일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출판문화사업을 통하여 민중의 지식 계발운동을 하여 기미독립운동과 같은 전 민족이 하나같이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불씨를 피워준 예도 없다.
천도교의 출판문화사업의 커다란 공적은 대략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출판물을 통하여 밖으로 조선의 전 민중을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지식과 세계의 사상과 국제정세와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함으로서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독립의 의지를 배양시켰다는 것과 안으로는 교인들을 교육시켜 수운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새사람이 되게 하여 지상천국 건설에 역군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리서와 신문, 월간잡지들이 작게는 3, 4000 부에서 많게는 2백 만 부를 간행하여 조선 민중과 교인들의 지식계발운동의 교재가 되게 하였으며 1910년 전후에 100만 교도가,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20년대 전후엔 200만으로, 청년당 또는 청우당이 출판운동과 7개 부문운동이 최고에 달했던 30년대 중반에는 300만의 교도와 당원이 민중에 선봉에 서,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 인구로 대비하여 추산해보면, 출판물이 월간 약 4, 50만 부를 간행 배포하였음으로 월간 100만 부에 해당하며 교도 300만 명은. 약 1000만 명으로 계산됨으로 그 규모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출판문화 중심에 천도교 월보에서 시작하여 개벽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신명을 바친 청오 차상찬이 있었으며 출판문화의 놀라운 성공 속에 청오의 피와 땀과 삶이 전부 녹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청오와 같은 인물을 찾아 육성하여 신명을 바쳐 지대한 공을 이룩하게 한 것은 천도교의 복이었다.
청오는 개벽이 3, 1운동의 실패로 인한 민족주의의 분출구로 자처하고 나섰던 그 창간의 참뜻을 기리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8년 만에 속간하게된 개벽 속간호의 권두언에서 그는 이렇게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우리는 각오하고 결심하였습니다. 최후 1인 최후의 1각까지라도 본 지를 위하여 분투용전하려고.... 오늘에 사세가 비록 沈寂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주의와 정신이 변치 않는다면 만천하 동지가 다 우리를 응원하고 지지할 터인즉 우리는 거기에 다시 자신이 생기고 자위가 생기고 앞으로 백 배 천 배의 용기를 내어 光榮의 역사를 가진 개벽자의 사명을 다하려 합니다."
청오의 생애와 업적과 작품에 관한 글로는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 최덕교의 "일제와 싸운, 큰 잡지 <개벽>에서
"그는 개벽이 죽고 나서 잡지가 없는 세월을 한때는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1937년 <野談> "야사와 민담"을, 1938년<조선 중앙일보>에 역사소설 "장희빈"을, 1939년 <매일신보>에 "징기스칸"을 연재하면서 많은 저술을 했다." 라고 쓰고 있다.
1946년(59세) 광복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급환으로 3월 24일(음 2월20일)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던 그는 중풍과 영양실조로 안타갑게 59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또 하나의 출판 문화의 커다란 별이 사라진 것이다.
필명 靑吾, 壽春山人, 月明山人, 三角山人, 鷲棲山人, 翠雲生, 江村生, 觀相者, 史外史人, 車記生, 車夫子, 車賤子, 酒賤子, 風流郞, 考古生, 門內漢, 傍聽生, 禿頭博士, 차돌이,
각살이, 三淸洞人, 嘉會洞人 등
유고 <朝鮮史 千年悲史,> 1934.
<海東艶史> 1937.
<朝鮮 白話集> 1941.
<朝鮮史 外史> 1947.
<韓國野談史話 全集 5> 1959.
계속되는 글은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개방된 사이트인
* 출처 : 천도교,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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