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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정리하다-기억의 형태와 두뇌 저장

BUZZWeb 2011. 10. 2. 00:53

기억을 정리하다 

기억의 형태와 두뇌 저장

                                                      

Ⅰ  

 

감기약을 먹었는데도 잠들지 못했다. 내내 뒤척이면서 10년 간의 이상한 유학 생활을 떠올렸다.   

 

KLM안에서 줄창 펑펑 울거나 찔끔찔끔 울면서 생각한 유학 생활은 아르바이트하고, 친구들 만나서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대학 도서관에서 책 읽는 그 쯤이었는데, 현실은 야멸차게 상상을 배반했다.   

 

아르바이트 할 시간에 기저귀 갈고 우유를 탔고, 친구들과 노닥거리는 대신 가사 노동에 휘둘렸으며, 도서관에서 책 읽지 못하고 골방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겼다. 지도 교수는 내가 사는 곳에서 6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만나는 것도 일이었다.   

 

내가 학위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나와 남편. 남편이야 믿어주는 게 예의였다치더라도, 내가 논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건 무모한 일이기는 했다. 애는 치렁치렁 매달리고, 지도해 줘야 할 교수는 천리 밖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마침표가 눈에 보였다. 누구나 안개길 인생을 헤매다가 이런 저런 표지판을 만나겠지만, 내 길에도 표지판은 있었다. 표지판이 사람도 책도 아니라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걸 만나지 않았다면 마침표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라빌레트의 과학 마을(씨떼 데 씨앙스). 파리 북동쪽, 중심의 현란함과는 거리가 먼, 칙칙한 회색빛 건물들이 즐비한 라빌레트 지역의 과학 도서관. 센느강을 굽어보고 있는 거만한 미테랑 도서관과는 격이 다르다. 미테랑 도서관이 귀족적이라면, 과학 마을은 대중적이다. 공룡같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위압하지 않는다. 과학과 관련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곳. 퍼포먼스, 강연, 세미나, 심포지엄, 영화, 도서관, 직업에 대한 자문까지... 자연 현상에 갓 눈을 뜬 세살짜리부터 여든 노인네까지 마을 풍경 속엔 있다.   

 

인용을 하거나, 참조하기 위해 찾는 거의 모든 책들이 도서관에 있었다. 책 찾아 삼만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읽고, 생각을 가다듬고, 쓰기만 하면 됐다. 가끔 숙제 검사를 맡으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는 ? 그런데 ? 그래서 ? 자문하다가 잠이 들었다.     

 

 

  

 

기억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시간이 남아 돌아서 그런가, 지나온 순간들을 기억할 때가 많다. 그런데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는 기억이든, 김치국에 밥말아 먹는 기억이든 그런 개별적인 기억이 아니라, 두뇌 속 어딘가에 저장됐다가,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기억 일반이라는 사실이 매우 유감스럽긴 하다. 잠들기 전 회상도 엉뚱하지만, 잠에서 깬 뒷 얘기를 이어갈 이유를 전혀 찾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대신 기억 연구의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얘기 한토막을 전한다. 

 

H.M이라는 이니셜로 알려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H.M은 아홉살 때 자전거를 타다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머리를 다친 그는 간질병을 앓게 되었다. 스물 일곱살이 됐을 때 그의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H.M은 1953년, 미국 코네티컷주의 하트포드 병원에서 윌리엄 비셔 스코빌의 집도하에 수술을 받는다. 스코빌은 H.M의 두뇌에서 좌반구, 우반구의 측두엽(해마 포함)을 제거했다. 수술을 받은H.M은 더 이상 발작을 하지 않았지만, 기억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기억할 수 있었지만, 그의 기억 능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일을  기억하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됐다.[1]     

 

 

1957년, 스코빌은 브렌다 밀러라는 캐나다 맥길 대학의 심리학자와 공동으로 H.M 보고서를 발표한다. 1930년대 이후로 캐나다 몬트리올(퀘벡)에 있던 맥길 대학과 몬트리올 신경학 연구소는 기억이 두뇌의 특정 부위에 저장된다는 « 두뇌 영역 이론 »을 충실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벌어진 논쟁을 기억하시길~) 결국, 브렌다 밀너는 H.M을 자신의 환자로 받아들이고, 30년간 그를 관찰하며 연구했다.   

 

뇌의 측두엽이 제거된 뒤에 H.M은 사건, 숫자 등을 잠시 기억할 수는 있지만, 곧 잊어버렸다. 즉, H.M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밀너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능력은 특정한 두뇌 영역, 즉 측두엽 안에 있다. 

2) 측두엽은 단기 기억을 저장하는데는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H.M의 단기 기억 능력은 아무 이상 없다)

3) 측두엽과 해마(hippocampe/hippocampus)는 장기 기억을 저장하는데 결정적인 (최종적인)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H.M은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

4) 다른 형태의 기억은 측두엽에 저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H.M은 특정 사실들을 배우고 기억할 수 있다)   

 

브렌다 밀너의 작업이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다.    

 

1) 과거 이론들을 증명한다. 즉, 기억의 형태를 분류할 수 있고(기억 형태 이론), 이것은 두뇌의 특정 영역에 저장된다(두뇌 영역 이론)는 주장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증명한다.  

 

2) 미래 이론들의 방향을 제시한다. 신경생리학자들(심리학자들)은 기억의 형태를 분류하고 그것이 두뇌의 어느 영역에 저장되는지를 밝히면 된다.    

 

 

Ⅲ  

 

이제까지 얘기해 왔던 기억들을 포함해서, 기억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 보자.   

 

1. 단기 기억 (mémoire à court terme/short term memory)   

 

짧은 순간 저장되는 기억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기억은 몇십 초간 유지되고, 이미지 예닐곱 개를 저장할 수 있다.  

 

1) 지하철에서 우연히 오랫만에 친구를 만나서, 안부를 묻고, 전화번호를 교환한다. 메모지가 없어 그냥 전화번호를 외운다. 02 247 8533… 02 247 8533…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 « 02 24… 뭐더라 ? »     

 

2) 처음으로 친구 집에 초대 받았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에 붙어 있는 사다리,  그 옆에는 오래된 구닥다리 소파가 놓여있다.   

 

1) 지하철에서 전화번호를 외운 것은 음성-언어 기억으로, 이 기억이 작동할 때, 뇌의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 그리고 전두엽이 활성화된다. 2) 처음보는 사물들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것은 이미지-공간 기억으로, 이 때, 전두엽의 시각 영역과 후두엽이 활성화된다.    (활성화된다는 말은 이 기억을 저장하는 동안, 자기공명영상 촬영을 해 보면 그 부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  

 

2. 장기 기억 (mémoire à long terme/long term memory)  

 

외부로 부터 들어온 정보들이 뉴런들의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쳐 장기적으로, 심지어는 평생 저장되는데, 이것을 장기 기억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언급한, 에피소드적 기억, 의미론적 기억, 진술적 기억, 절차적 기억 등등이 모두 장기 기억이다.   

 

1) 에피소드적 기억

내가 위에서 구구절절 풀어놓은 유학 체험의 기억이 바로 에피소드적 기억이다. 그걸 읊어댔던  순간, 내 두뇌 속에선 보이지 않는 빛들이 반짝거렸을 것이다. 이 기억을 상기하면, 측두엽에 있는 해마가 활성화된다.

 

 

2) 의미론적 기억

일반적으로 지식, 정보를 의미하는 이 기억은 전두엽 피질과 측두엽 피질에 저장돼 있다. 친구가 전해준 전화번호를, 지하철에 내려서도 02 247 8533… 하고 외운다면, 그건 의미론적 기억이라는 장기 기억으로 전환된 것이다.  

 

3) 절차적 기억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하고, 젓가락질을 하는 행위는 소뇌, 중추 피질 등이 관여한다.  

 

4) 감정적 기억

내 시누이는 마흔 다섯살. 아직도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잔다. 꼭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습관이란다. 이 습관이 왜 생겼나 ?를 내 나름 따져보니, 그건 프랑스식 아이 교육 탓이다. 이미 7~80년 전부터, 프랑스에선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부모와 떨어져 자기 방에서 자야한다는 ‘이상한’ 관습, 이론, 교육이 있었고, 내 시어머니는 충실히 이 전통을 지켰다. 한 살도 안 된 아기는 10평 쯤되는 우주보다 더 넓은 캄캄한 방에서 홀로 잠을 잤단다. 그 아기가 느꼈을 공포는 40년이 지난 뒤에, 의식적인 기억이 아니라, 습관 혹은 무의식적 행위로 남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감정, 특히 공포의 기억을 관장하는 영역은 해마 바로 위에 있는 ‘편도(amygdale)’라는 부위이다.     

 

 

Ⅳ  

 

이제, 장기 기억이 두뇌에 어떻게 저장되는지 정리해 보자.   

 

장기 기억의 저장은 변연계(système limbique/limbic system)라 불리는 뇌의 중심부와 관계 있다. 변연계는 시상하부(hypothalamus), 편도(amygdale), 해마(hippocampe)로 이루어져 있다.

 

1) 시상하부는 여러 통로를 통해 외부 정보를 수집한다.   

 

2) 해마는 기억 저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즉, 해마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만약 해마가 손상됐을 경우(H.M의 경우), 새로운 정보들을 기억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해마가 손상되기 이전의 기억은 간직하고 있지만(H.M은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새로운 정보들은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지 못하고 바로 지워진다.(H.M은 단기 기억 능력은 있지만, 장기 기억 능력이 없었다)   

 

3) 편도는 감정, 혹은 감정적 기억에 관여한다. 해마가 의식적인 기억인 에피소드적 기억과 의미론적 기억을 담당하는 반면에, 편도는 공포와 같은 감정적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저장한다. 아주 어릴 적 받았던 감정적 장애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내 시누이의 경우) 또한 편도에 이상이 있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예컨대, 편도를 제거한 쥐는 고양이를 공격한다.    

 

4) 그외 : 변연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관으로 대상회(gyrus cingulaire/cingular gyrus)가 있다. 대상회는 대뇌와 변연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상(thalmus)과 해마를 연결한다. 냄새와 통증에 대한 기억에 관여한다.   

 

총정리 : 시상하부가 수집한 정보들(단기 기억)은 해마로 집중되어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며, 이 기억들은 해마에서 두뇌의 다른 영역, 즉 측두엽 피질(cortex temporal)로 전달되어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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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억, 스콰이어, 칸델, 15페이지    

 

 

* 출처 : 김선주 학교, '철학, 기억을 말하다', 2008.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