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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번 먹자”에 숨은 빈말

BUZZWeb 2011. 1. 6. 15:04

“밥 한번 먹자”에 숨은 빈말
[매거진 esc] 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이효리 밥솥 CF "밥 한번 먹자"

 
“언제 밥 한번 먹죠.” 어쩌다 마주친 후배 녀석이 멋쩍게 웃으면서 밥 한번 먹자고 빈말을 던졌다. 멋쩍게 웃는 건 아마 신세를 졌던 과거를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이 공수표라는 걸 알면서 나도 ‘시간 될 때 밥 한번 먹자’고 화답했다. 우리는 빈말을 주고받고는 재빨리 어색한 만남을 모면하려고 서둘러 각자의 길을 갔다. 우리는 다시 어쩌다 한번 마주칠 때마다 ‘밥 한번 먹자’는 말로 순간을 모면하는, 서로에게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그 정도야 애교로 기억에서 지우면 간단하겠지만, 어쩌다 던진 빈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몰라보게 예뻐졌다, 좋은 사람 소개해주겠다,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사줄게, 매출을 달성하면 성과급을 파격적으로 주겠다, 이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빈말로 립서비스를 했을 뿐인데 상대가 그 말에 기대를 건다면, 빈말로 했을 뿐인데 책임까지 져야 한다면 서로가 난감한 상황에 빠질 게 분명하다.

 

빈말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문제지만 스스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함정을 파니 더 문제다. 특히 비즈니스에서 빈말은 지독한 올가미가 된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면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서 과연 완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진대, 이보다 더 위험한 빈말이 또 있을까? 결과는 99.9% “시간을 줬는데도 이것밖에 못해?”라는 혹독한 비판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빈말을 하는 까닭은 순간을 모면하려는 사회적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습관을 바꾸려면 마음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을 먼저 바꿔도 마음이 바뀐다고 한다. 초점을 생각이나 마음이 아니라 말 자체에 집중해보자. “많은 심리 실험 결과는 한마디 말이 인간의 마음을 좌우함을 보여준다”(건강경영 전문가 박민수)는 주장에 주목해보면 마음의 습관이 아니라 말의 습관을 바꿔도 된다는 것이다.

 

클라이언트 회의에 참석했더니 아까 우연히 마주친 후배가 협력회사 대표로 나와 있었다. 내가 클라이언트 일의 비중 있는 참여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후배 녀석이 은밀히 다가왔다. “선배님, 오늘 저녁 근사하게 낼게요.”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탁정언 카피라이터

 

 

* 출처 : 한겨레, 2011.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