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혈,venesection, 瀉血]피를 뽑아 치료한다?
피를 뽑아 치료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치료기술이었다. 현대 의학으로 넘어오면서 피를 뽑는 것은 구시대(?) 의학기술로 치부되고 있다. 한의학에서는 사혈, 부황 등을 통해 피를 뽑아서 치료하는 기술이 여전히 시술되고 있다. 사혈은 '피가 맑으면 질병이 없다'라는 명제에서 그 이치를 찾을 수 있다. 몸 속의 나쁜 피(어혈)을 없애고 해독해 주는 것이다. 부황 치료를 받으면 일시적으로 해당 병증이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술 후 바로 효과를 보는 듯한 느낌 때문에 무면허 시술자에 의해 사혈치료를 받다가 사망에 이르는 기사가 가끔 나기도 한다. 사혈을 동양의학이다, 서양의학이다 구분짓기는 어렵다. 옳은 치료법이다,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병을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하고 읽어보기 바란다. [편집자 주]
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과거에는 피가 아주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각종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이 다양했다. 드라마를 보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환자의 입 안에 한 방울 떨어뜨리기만 해도, 죽어가는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살아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피의 가치를 높이 사고, 피를 소중히 여긴 우리나라의 전통의학이지만, 특별한 순간에는 피를 뽑아내는 방법을 치료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 피를 빼버리는 것이 특이하긴 하지만 서양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흔하게 피를 뽑아내는 치료법을 시도해 왔다. 이를 사혈이라 하며, 이 방법은 현대의학에서 거의 이용되지 않지만, 역사적으로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기원전 377?)가 활약한 기원전 5세기부터 약 100년 전까지 널리 이용된 치료법의 하나다.
피를 뽑아내는 치료, 사혈의 역사는 깊다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의학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던 미미한 의학 수준을 한층 끌어올려, 질병이 자연현상의 하나이므로 인간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질병은 인체 내부의 생리적 불균형 또는 인체 내부와 외부 환경의 부조화에 의해 발생한다.”라고 히포크라테스가 주장하기 전까지 질병이란 신이 인간에게 주신 벌이었다. 그러므로 병이 생기면 직접 치료하기보다는 신에게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비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네 가지 체액, 즉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의 균형이 건강을 유지하게 하며, 어떤 이유에서건 네 가지 체액에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라 생각했다. 이를 4체액설이라 하며, 2세기에 로마에서 활약한 갈레노스(Claudios Galenos, 129?~199?)는 이를 더욱 체계화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이론을 공부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역사 상 가장 오랜 기간 의학을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는 갈레노스는 4체액설을 더욱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몸에 들어 있는 체액에 불균형이 발생하는 경우, 이를 바로잡으려는 방법의 하나로 사혈을 소개함으로써 오랜동안 사혈이 질병치료를 위해 이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부위의 피를 얼마나 빼내는 것이 좋은지는 아무도 몰라
피를 빼내기 위해서는 피를 담은 혈관에 손상을 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얼른 의문이 생긴다. 어떤 병이 생겼을 때, 어느 부위에 있는 혈관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내어,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뽑아내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의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피를 뽑아내는 것 자체가 워낙 좋은 치료법이니 피를 뽑아내는 장소나 양을 무시하고라도 뽑아내기만 하면 몸에 이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 질병 발생 부위에서 가까운 혈관에 상처를 내는 것이 좋은지, 먼 곳에 있는 혈관의 피를 빼내는 것이 좋은지 논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결말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결론이 없는 논쟁이었으므로 어느 방법이 좋은지 증명하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윌리엄 하비가 발표한 혈액순환이론이 진리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논쟁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혈액이 온몸을 계속해서 돌아다니므로, 어느 위치에서 피를 뽑아내건 어차피 같은 피이므로 부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다.
피를 뽑아낼 때 ‘적당히’ 뽑아내고 나서도 질병이 낫지 않으면, 뽑아낸 양이 적다고 판단하여 더 빼냈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또 더 빼내다 결국 혈액부족에 의해 사망하는 예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선의 치료를 다하고 맞이하는 어쩔 수 없는 불행한 결과’일 뿐이었다.
사혈을 위해 다양한 기구가 고안되었고, 그 중 하나가 거머리
상처가 생겨서 피가 흐를 때, 상처가 크면 출혈량이 많아서 문제가 되고, 상처가 작으면 금세 상처가 아물어 피가 흐르지 않게 되므로 원하는 만큼 피를 뽑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천 년 이상 사혈이 바람직한(?) 질병 치료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면서 사혈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방법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사혈 시행을 용이하게 했다.
사혈을 위해 시도한 방법은 정맥에 상처를 내는 방법과 흡각과 같은 기구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19세기 초에 프랑스 의사인 브루세(Francois-Joseph-Victor Broussais, 1772~1838)는 사혈을 위해 거머리를 널리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사혈을 시행하기 위한 거머리를 어느 의사가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명의의 구분 기준이 되기도 했다. 물론 화살촉이나 칼로 정맥에 상처를 내는 방법이나 사혈을 시도하기 위해 의사들 각자가 고안한 기구가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이와 관련된 수많은 방법이 개발되었다.
사혈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사혈이 진짜로 질병 치료 효과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에라시스트라토스(Erasistratos, 기원전 310?~기원전 250?) 학파에 속하는 이들은 인체 내 피의 양을 줄이는 것은 좋은 치료법이기는 하지만, 사혈은 아주 위험한 방법이므로 사혈 대신 단식을 통해 혈액량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7세기에 혈액순환 이론이 제시되기 전에는 섭취된 음식으로부터 피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이론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론이었다. 사혈을 시행하는 중에 환자가 의식을 잃게 되면,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사혈 도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사혈의 위험성을 지적한 학자들도 계속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질병이 전염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의 프라카스토르(Girolamo Fracastoro, 1478~1553)는 체액의 불균형에 의해 질병이 발생한다는 이론에 의문을 가졌다. 따라서 사혈의 치료 효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화학자로 더 유명하고, 연금술사로도 알려진 헬몬트(Jan Baptist van Helmont, 1579~1644)도 사혈의 효과에 의문을 가져 환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사혈과 다른 치료법을 별도로 실시하여 결과를 비교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이 제안은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날 때까지 몇몇 연구팀에서 비슷한 연구를 했고, 사혈의 효과에 부정적인 결과를 얻으면서 사혈은 서서히 쇠퇴해 갔다.
20세기 초까지 사혈은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널리 인정받았으나
실험군과 대조군을 비교하는 연구를 통해 사혈의 효과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사혈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있지 않은 시절이라 그 속도는 아주 느렸다. 그 와중에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도 한편에서는 사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그의 주치의였던 러시(Benjamin Rush, 1745~1813)도 사혈의 효과를 신봉한 의사였다. 그는 동맥의 상태가 사혈의 효과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1799년에 워싱턴 대통령이 인후에 생긴 염증으로 고생하던 시기에도 여러 의사를 시켜 사혈을 시도하게 했다. 약 2리터 정도의 피를 이유 없이 몸 밖으로 내보내야 했던 워싱턴 대통령은 결국 사망하고 말았으니, 직접적인 사인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이렇게 많은 양의 피를 내보내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17~19세기에 걸쳐 사혈이 질병치료와 무관하다는 과학적인 연구결과가 수시로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오늘날 의학연구를 위한 최고의 기관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세우는데 공헌한 오슬러(William Osler, 1849~1919)가 “사혈은 폐렴 치료에 좋은 효과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너무 사용을 적게 했다.”라는 기술을 남긴 바와 같이 20세기 초까지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 사혈은 사라져야 할 치료법
체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바늘로 손가락 끝을 따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에도 사혈은 계속 이용되고 있다. 이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효과를 판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직접 느끼는 것이다. 이 방법의 최대 단점은 손가락 끝에 생긴 상처를 통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이 침입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혈은 그 효과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부족하고, 실제로 효과를 보이는 경우도 없으므로 상처로 인한 감염발생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라져야 할 치료법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우리 몸에서 필요 이상으로 적혈구의 수가 크게 증가하는 진성적혈구증가증과 같은 질병은 과다한 적혈구를 제거하기 위해 몸에서 피를 빼내는 것이 지금도 행해지는 치료법의 하나다. 유전성 혈색소침착증과 같이 몸속에 철분이 과다하게 축적되는 경우 이를 배출하기 위해 사혈을 실시하면 철 농도가 줄어들면서 심폐기능이 향상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특발성 피부 포르피린증과 같은 질병은 피를 빼내면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증상을 호전시켜 줄 수도 있다. 아무리 현대인의 눈에 황당하게 보이는 치료법인 사혈이라 해도 아주 특수한 질병에서는 실제로 치료를 위해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글 예병일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저서로는 [내 몸 안의 과학]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의사를 꿈꾸는 어린이를 위한 놀라운 의학사] 등이 있다.[내 몸 안의 과학]은 교과부에서 2008년 상반기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
이미지 TOPIC / corbis
*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과학, 20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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