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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함께 둘레둘레 걷는 길

BUZZWeb 2009. 5. 10. 12:01

둘레길, 함께 둘레둘레 걷는 길 
[레드 기획] 길을 연 지 1년도 안 돼 수만 명이 다녀간 지리산 둘레길, 800리의 고마움 
 
▣ 윤승일   


인월(引月)에서 밤을 맞는다. 늦은 시간 창을 밝히는 빛에 창문을 여니 사위가 환하다. 반달임에도 구름 한 점 없어 빛은 거침이 없고, 산골임에도 너른 들녘은 여과 없이 달빛을 받아들인다. 1380년,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도 저 달을 만났을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의 운명까지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로 침범해온 왜구를 이곳 인월에서 대파했다. 신통력을 발휘해 달을 끌어내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전북 남원시 인월면의 땅이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내력을 설명한다. 

 


≫ 장항마을의 당산 소나무. 당산신앙에는 자연과 함께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전통이 남아 있다. 지리산 둘레길 1구간은 사진 왼쪽 시멘트길로 이어진다. 

 

경남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서 만난 가야의 양왕은 ‘백성을 위해’ 제 나라를 버렸다. 인월에서 만난 이성계는 ‘백성을 위해’ 제 나라를 세웠다. 세월의 거리를 두고 하나의 땅에서 명멸해간 두 왕조의 어느 백성이 더 행복했을까? 속절없음에도 부질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어지럽힌다. 산골의 밤은 땅이 간직한 아픔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평화로웠고 길었다.

 

 

인월에서 마천 세동마을까지

 

큰 산 지리산은 그만큼 산자락도 넓어 품은 마을도 많다. 지리산 자락인 3도 5개 시·군의 100개 마을 길을 환형으로 연결해 800리 걷는 길을 조성하는 ‘둘레길’ 사업이 1차 성과로 2개 구간 20여km의 길을 열었고, 지난해 9월에는 여기에 6km의 길을 더했다. 인월에서 시작해 마천의 세동마을까지 둘레길은 지리산을 벗하며 걷는 길이다. 산에 들면 산을 보지 못하는 법. 산을 만나고 싶었다. ‘길과 길이 만나는 길, 자연에 드는 길, 마을과 사람을 잇는 길, 문화와 역사를 잇는 길’로서 지리산 둘레길은 10년 전 백두대간에서 만났던 길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앞사람의 등산화만을 보았다”라는 답을 한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로 백두대간 종주 길에선 속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관조함으로 깨닫고 벗함으로 소중함을 배우는, 그래서 우리 삶을 좀더 가치 있게 하는 여행을 배우고 싶었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길은 나무 팻말에 새겨진 빨간색 화살표와 검은색 화살표를 따른다. 빨간색은 인월에서 마천 방향이고 검은색은 그 반대 방향을 안내한다.

 

처음 만나는 길은 둑길이다. 왼쪽으론 봄을 맞는 남천을, 오른쪽으로는 겨울을 벗어내는 들판을 벗삼는 둑길에서 만나는 바람이 상큼하다. 길은 곧 아스팔트로 이어져 중군마을에 이른다. 임진왜란 당시 전군, 중군, 후군 가운데 중군이 주둔했던 내력으로 마을 이름도 중군이라 불리게 됐다는 마을에서 길은 다시 시멘트길로 바뀐다. 흙길이 아쉽지만 마을의 길은 농기계가 오가는 농로였다. 길지 않은 길에서 길의 세 모습을 만났다. 길은 제 쓸모에 맞게 모습을 갖출 때 아름답다. 걷는 길은 흙길이면 족하고 농기계가 다녀야 하는 농로는 시멘트길로도 제 쓸모를 다한다. 아스팔트길은 자동차를 위한 길이다. 도시 사람에게 흙길이 소중한 것은 일상의 길이 포장길인 탓이다. 도시의 일상이 흙길로 이어진다면 그 불편을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둘레길이 모두 흙길일 수 없는 이유는 그 길이 생활의 공간인 탓이다. 명분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감추며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강요하지 않는 것. 어제와 오늘의 길이 함께하는 둘레길이 가르쳐준 공존의 길이다.

  
 
≫ 둘레길이 보여주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비탈진 밭에서 봄을 맞는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서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강인함을, 창원 마을 무인 판매대에서는 넉넉한 인심을, 둘레길 곳곳에서 만나는 다랑이 논에서는 민족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60번 국도 옆 지름길을 깨우다


중군마을을 지나 임도와 겹쳐지는 둘레길은 백련사를 앞에 두고 산으로 내리막을 탄다. 장항마을로 가는 그 길은 숲으로 이어진 작은 산길이다. 인월과 마천을 잇는 60번 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장항마을 사람들이 인월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번잡했다고 한다. 길은 산비탈을 오르지 않고 에돌며 숲으로 안내한다. 낙엽 이불을 덮은 작은 생명들이 언뜻언뜻 초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좀처럼 꽃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피해 낙엽 이불 속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을 터였다. 낙엽을 한 꺼풀 걷어내면 작은 꽃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여린 꽃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다. 인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숲을 빠져나가는 길을 쫓는다.

 

노루목이라는 뜻의 한자말인 장항마을에서 순례자를 맞는 것은 잘생긴 소나무다. 지리산 반야봉을 배경 삼아 포즈를 취한 소나무는 장항마을 위 당산나무다. 400년은 넘었을 것이라는 소나무의 잘 자란 자태는 당산나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겨울을 났으면서도 초록이 싱싱하다.

 

오랜 민족신앙인 당산신앙은 자연에도 생명과 신격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장항마을 위 당산 소나무는 마을 북쪽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가꾸어져왔다고 한다. 부족한 기운을 보해 넘치는 기운을 막는 우리나라 전통 풍수인 비보풍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소나무 아래에는 여느 당산에서 찾아보기 힘든, 돌로 쌓은 제단이 남아 있다. 제단은 당제를 치르는 신성한 공간이자 당제를 치르고 난 음식을 자연에 기대어 사는 다른 생물들과 나누는 나눔의 자리이기도 하다.

 

둘레길은 넓고 빠른 60번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오르는 아스팔트를 따른다. 이제처럼 길은 곧 시멘트길로 바뀌고 지리산 큰 자락은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1구간 다랭이 논길이 시작되는 매동마을 뒷산에서 지리산은 V자 모양으로 깊게 골을 파며 첩첩이 겹쳐진다. 그 아래가 뱀사골 계곡이다. 여순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산사람’이 되어 죽어간 곳이기도 하다,

 


첫 매점에서 만난 김분임 할머니


뱀사골이 보이는 언덕 위 밭에서 걸음걸이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이른 농사일을 시작한다. 밭두렁에 가려질 정도로 작은 몸에 맨손으로 흙을 다듬는 할머니의 표정은 도대체 읽히지 않는다. 낯선 이의 발길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할머니가 살아낸 세월 속에 일제와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가 있을 터였다.

 

매동마을에서 둘레길은 산비탈로 이어져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을 지나 등구재로 이어진다. 중황마을을 지나는 산길에서 김분임(76) 할머니를 만났다. 둘레길에서 만나게 되는 3곳의 매점 가운데 할머니의 매점이 첫 번째다. 하황마을에서 태어나 중황마을로 시집와 평생을 산 할머니는 한 번도 지리산 자락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남편이 뱀사골의 ‘산사람’에게 끌려갔다가 이틀 만에 무사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고, 7남매를 두고도 단 한 명의 자식도 앞세우지 않고 모두 건사했으니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연방 웃음을 짓는다. 농사일이 힘들어 동물을 키우다 그도 힘들어 벌을 키웠는데 판로가 없어 걱정하던 참에 사람들이 많이 오니 꿀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좋지 않냐고 말하는 할머니는, 경상도 억양에 전라도 어휘로 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중황 사람들이 목기를 만들어 등구재 넘어 마천장을 보기도 하고 마천 사람들이 등구재를 넘어 인월장을 오가기도 했으니 말씨가 섞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둘레길이 보여주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비탈진 밭에서 봄을 맞는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서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강인함을, 창원 마을 무인 판매대에서는 넉넉한 인심을, 둘레길 곳곳에서 만나는 다랑이 논에서는 민족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중황마을에서 건너 보이는, 천석꾼이 살았다는 상황마을은 인근에서 가장 넓다는 실상사들보다도 더 많은 소출을 내는 땅이다. 비탈이어서 좁아 보이지만 실면적은 실상사들보다 더 넓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만한 비탈에 가득한 다랑이 논은 계곡에 자리잡은 논부터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수백 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만들어졌을 다랑이 논은 일부는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일부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농사를 지을 젊은 사람들이 없는 탓도 있지만 더 이상 쌀농사가 먹고살 만한 소득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다랑이 논은 지리산 자락에만 존재하던 경작지가 아니었다. 국토의 64%가 산지인 좁은 땅에서 비탈이라고 농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두대간 자락에서 다랑이 논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악산 한계령 골짜기에는 다랑이 논에 불을 지필 수 있게 한 아궁이 논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추위에 냉해를 입을까봐 논바닥에 온돌을 놓아 아궁이 논이다. 이제 5월이 되고 다랑이 논에도 모내기가 이뤄지면 산은 초록의 바다로 변하게 될 것이다. 초록의 바다를 지탱하는 돌 하나하나는 삶을 살아낸 옛사람들이 남긴 땀의 화석이다. 행여 그 길을 지나게 되면 논을 이룬 돌 하나에 땀 한 바가지가 배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등구재 넘어 만난 풍광에 탄성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거북이를 닮았다는 등구재를 넘어 경상도 함양 땅으로 접어든다. 창원마을 사람들이 인월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던 등구재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잊혀졌던 길이다. 길은 되살아나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립의 땅이 아니라 함께 삶을 일구는 이웃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둘레길 사업은 관광자원으로서 ‘트레일’을 새로 내는 의미를 넘어 길을 소통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자연을 잇는 길은 소통의 공간이자 공유의 장이다. 둘레길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산골의 삶을 만난다. ‘보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사랑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등구재를 내려서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연못은 가뭄으로 말랐지만 여전히 깊어 보인다. 산 아래 창원마을 다랑이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였던 연못은 수로가 이미 망가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제 역할을 이제 다한 듯 보인다. 다만 산속에 자리잡은 탓에 뭇 생명들의 갈증을 달래는 역할은 여전히 할 수 있다. 지날 때 조용하게 지나야 한다는 안내를 따르는 것도 공존의 길에 함께하는 방법이다.

 

등구재 길을 빠져나오면 저절로 나오는 탄성을 어찌할 수 없다. 갑자기 트이는 시야 한가득 다랑이 논과 그 너머 병풍처럼 선 지리산의 풍광은 아름다움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보여준다. 왼쪽으로 중봉과 하봉을, 오른쪽으로는 제석봉을 거느린 천왕봉의 모습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가 소백산을 지날 때 엎드려 절을 했다는 심정을 이해하게 한다.

  
 
≫ 둘레길이 보여주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비탈진 밭에서 봄을 맞는 할머니의 작은 어깨에서는 삶의 무게를 이겨낸 강인함을, 창원 마을 무인 판매대에서는 넉넉한 인심을, 둘레길 곳곳에서 만나는 다랑이 논에서는 민족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공물을 모아두는 창고가 있어 창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창원마을에서 둘레길은 한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둘레길이 많은 발길을 모을수록 마을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등구재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놓인 간이 화장실은 그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렇다고 마을 인심이 넉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창원마을은 자신들의 당산을 둘레길 순레자들에게 쉼터로 내주었다. 등구재 아래서 만나는 무인쉼터는 인간에 대한 산골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나 높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격표와 간단한 음료수가 놓인 그 쉼터에는 순례자들의 갈증과 고단한 발을 쉬게 하려는 배려가 넘친다. 그 배려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려면 받은 배려만큼 돌려주는 보은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지나며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스치는 생명들을 귀하게 대하는 정도로도 고마움은 표시할 수 있다.

 


마을 공간을 이방인에게 내준 인심


창원마을에서 1구간이 끝나는 금계마을까지 둘레길은 다랑이 논을 지나고 다시 숲을 지난다. 금계마을 초입에서 만나는 펜션은 아예 한 공간을 떼어내 휴식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천왕봉과 칠선계곡이 두 눈으로 넘치게 들어오는 그 자리엔 비록 낡았지만 피곤한 다리를 쉬기에 충분한 소파가 놓여 있고 커피 향이 유난히 달콤한 자동판매기가 놓여 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상대를 위하는 배려의 모습을 만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계마을에서 지리산 순례길을 마친다. 그러나 ‘산사람의 길’로 이름 붙여진 둘레길 2구간은 금계마을에서 출발해 의중마을을 지나 벽송사를 거쳐 송대마을과 세동마을까지 이어진다. 1구간에서 다랑이 논이 길동무를 해주었다면 2구간에서 길동무는 엄천강이다. 둘레길은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의중마을 당산을 지나 마을을 에둘러 숲으로 들어간다. 소나무숲인가 싶으면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고, 오르는가 싶으면 내려서는 길은 자동차길이 생기기 전에 벽송사로 가는 길이었다. 길은 아들과 손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절을 찾는 할머니도 쉽게 오를 정도로 편안하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산사람’들이 야전병원을 운영하던 곳이다. 그 때문에 벽송사는 모두 불태워졌고 지금의 가람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새로 지어져 정갈하다. 한국 불교의 선맥을 이은 절답게 절은 조용하다. 시간이 허락해 하룻밤 묶어간다면 둘레길 순례의 의미를 더 각별하게 할 수 있다. 벽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목장생이다. 특히 풍부한 표정은 볼수록 무한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원래의 목장생은 사찰 안 정려각에 보존돼 있다.

 

벽송사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기 전에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송진을 채취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나무들이다. 그 상처는 궁핍했던 살림살이의 기억이며 일본 제국주의 착취의 상징이며 혁명을 꿈꾸던 산사람들의 불안하고 긴 밤을 추억한다.

  
 
≫ 금계마을에서 바라본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은 의중마을(맨 왼쪽)을 지나 벽송사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벽송사의 목장생. 다양한 표정과 과감한 조각 기법은 민중미술의 해학과 창의력을 보여준다. 

 

벽송사에서 송대마을로 가는 길은 숲길이다. 돌이 없는 흙길에 낙엽이 소복해 마치 양탄자를 밟고 가듯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 마지막 산사람 정순덕씨가 1963년까지 숨어 지내던 선녀굴이 있는 송대마을에서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마을 이름이 견불동이다. 부처를 만난다는 곳이다. 견불동에서 송대마을을 보면 지리산 능선이 마치 누워 있는 부처님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대마을을 지나면 길은 둘레길의 끝인 세동마을까지 임도다. 길은 대부분 내리막이라 마지막 구간의 힘을 덜어준다. 송대마을에서 세동마을로 가는 길에서는 가능한 한 자주 뒤를 돌아봐야 한다. 길 따라 변하는 지리산 풍광이 아름답다.


 

수직으로 올라 정복할 필요 없어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지리산 둘레길을 기획한 이들은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정복의 길이 아니라 수평으로 눈높이를 맞추고 향유하며 함께 거니는 길’을 꿈꾸고 있다. 길은 앞선 사람의 발자국으로 시작하지만 길을 완성하는 것은 뒤를 따르는 이들의 발걸음이다. 행여 불만을 만나면 위로하고 고개 숙이고, 행여 환대를 만나면 고개 숙이고 감사하며 길을 걸을 일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이제 시작이고 우리에겐 800리 둘레길이 너무나 필요하다.

 

 

# 여행 정보

 

전 구간은 여유롭게 1박2일로


지리산 둘레길 순례는 대부분 인월에서 시작한다. 안내센터가 자리잡은 탓이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 버스를 탄 뒤 인월에서 하차한다. 혹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함양까지 온 뒤 함양에서 인월로 가는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인월에는 찜질방 같은 잠깐 휴식할 장소가 없으니 새벽에 도착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승용차는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 함양IC → 88고속도로(광주 방향) → 지리산 톨게이트를 따르면 된다.

  
 
≫ 둘레길 개념도 

 
좀더 조용하게 걷고 싶다면 세동마을에서 인월 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곳곳에 안내판이 잘 세워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지도와 비상식량 등은 꼭 챙기도록 한다. 지리산 안내센터 홈페이지(www.trail.or.kr)에서 필요한 지도와 정보 등을 내려받을 수 있다.

개통된 전 구간을 돌아보려면 1박2일의 일정을 잡는 편이 길을 서두르지 않게 한다. 익숙한 도시의 편리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마을의 민박이나 실상사와 벽송사의 템플스테이를 이용할 수 있고, 인월과 함양에 숙박업소도 여럿 있다. 함양 마천의 창원마을과 금계마을에는 펜션도 영업 중이다. 매동마을(maedong.org), 송전마을(kr.blog.yahoo.com/songjunri), 실상사(www.silsangsa.or.kr), 벽송사(www.amita.pe.kr) 등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 협찬: 니콘

 

* 출처 : 한겨레21, 2009.03.27 제7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