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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자락에 누워봅시다

BUZZWeb 2009. 5. 10. 11:51

백두대간 자락에 누워봅시다  
[레드 기획] ‘신백두대간 기행’ 첫 회… 백두대간을 25구간으로 나눠 소개하는 1년 여정의 첫걸음 

 
▣ 윤승일   
 
저물어가는 해가 금물 들이는 계곡에서 그를 만났다.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그는 돌무더기에 묻혀 있었다. 그를 만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20세기 마지막 해 <한겨레21>은 백두대간을 연재했다. 연재의 마지막 구간인 지리산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왕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철기 문화를 가진 나라였지만 신라에 귀속됐다. 비단과 금은보화와 함께 신라에 나라를 바치고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됐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역사는 가야의 맹주국이던 금관가야의 왕이 왜 지리산 자락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해두지 않았다.


 ≫ 첩첩이 겹쳐진 산. 한반도의 모든 산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그 끝은 백두대간과 닿는다. NIKON D90 

 
이긴 자들이 남긴 글은 역사가 되고 진 자들을 추억하는 말은 전설이 된다. <삼국사기>는 그를 구형왕이라 적고 있고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양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사직을 지키는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해 백성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당부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줬다고 한다.

 

양왕 전설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미래를 갈망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끊어지지 않는 능선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의 골짜기와 산은 양왕 전설 이외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엔 한결같이 사람답게 살기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환경을 말하고 생태를 논하는 것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10년 전 백두대간 연재에서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이야기와 잘못 알려진 자연을 전했다. 그 뒤 10년, 백두대간에는 여전히 길어내야 할 역사와 문화가 남아 있고, 찾아내야 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사는 길이 있다. <한겨레21>은 다시 백두대간을 간다.

 


<산경표>와 <태백산맥은 없다>의 공

 

양왕을 만나러 지리산으로 가는 길. 에두르는 길을 잡았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길 3500여 리에서 진부령은 갈 수 있는 백두대간과 갈 수 없는 백두대간을 나누는 지점이다. 1980년대 중반 시작된 백두대간 종주 등반에서 많은 이들이 진부령에서 시작의 각오를 다졌고 끝의 감격을 나눴다. 달이 밝은 밤, 진부령을 내려오는 길. 계곡을 따라 드리워지는 산 그림자는 길고 길어 끝을 알 수 없다. 흐르는 것은 강뿐이 아니다. 산도 흐른다. 산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로 흘러가며 어디서 끝나는가? 다만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길을 내느라 살을 내준 산 사면에 달빛이 비친다. 허옇게 빛나는 바위 벽이 마치 뼈와 같다. “우리 조상은 이 땅을 뼈와 피의 흐름을 가진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는 그런 인식의 구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통해 잃을 뻔했던, 그 현명했던 땅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일이 곧 불구가 돼가는 이 강토를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인 <산경표>를 발굴해 백두대간을 복원하는 첫 단추를 끼운 지리연구가 이우형(2001년 작고)씨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이우형씨가 복원해낸 <산경표>는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산경표>(1769)가 기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산들을 족보 식으로 연결해놓은 <산경표>의 원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남아 있지만,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는 산경 개념이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지리 인식 체계로 자리잡았음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 백두대간 개념도

 

이우형씨가 <산경표>를 찾아냄으로써 잊혀질 뻔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 인식 체계를 복원해냈다면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는 의사이자 산악인인 조석필씨다. 1993년 조씨는 <산경표를 위하여>라는 책을 자비로 펴냈고, 이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완한 <태백산맥은 없다>를 1997년 4월 펴냄으로써 백두대간이 비로소 세상에서 빛을 보게 만들었다.

 

족보 식으로 산의 계통을 정리한 <산경표>는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는 우리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를 대표한다. 온 국토의 산을 물길을 넘지 않는 선으로 연결해 나가면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는 13개 큰 줄기로 정리돼 백두대간에 닿는다. 이것이 13정맥이다. 정맥의 이름이 한남금북정맥(한강의 남쪽과 금강의 북쪽)식으로 강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산을 계통화하기 위한 기준을 강에 두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과 13정맥에 강을 품지 않는 산줄기 하나를 정간으로 더하면 총 15개 산줄기로 온 국토의 산들은 정리된다(그림 참조).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으로 요약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는 ‘산수경’(山水經)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산수경은 땅의 생김새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기후나 토양에 따라 달라지는 각 지역의 생활공간을 한눈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운 현대적 지리 지식으로는 호남 지방과 영동 지방 등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으나 산수경 철학을 바탕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옛 지도에서는 그것들을 구별하는 일이 어렵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일본 산맥 체계 가르치는 학교

 

낙동강을 품는 낙동정맥이 시작하는 백두대간 매봉산에는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가 있고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와도 가깝다.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의 최상류 지역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점령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랭지 배추밭에 뿌려지는 농약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 농약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는가? 등고선이 복잡한 현대의 지도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물길이 산수경에서는 한눈에 드러난다. 산수경으로 지리를 이해했다면 매봉산의 고랭지 배추밭은 들어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땅을 수탈해야 할 자원의 창고로 인식하는 일본식 지리 체계는 지질학자에게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생활지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산경표>를 복원하고 알려낸 이우형·조석필씨 같은 이들의 지적이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보통명사로 쉽게 사용되는 요즘도 학교는 여전히 일본인 고토 분지로가 세운 산맥 체계를 가르치고 있다.

 

매봉산 삼수령을 넘어 첩첩산중의 모퉁이 모퉁이를 이은 길을 달린다. 오랜 가뭄으로 계곡은 지쳤고 봄을 맞는 나무들조차 생기가 없어 보인다. 남사고가 “만인을 살릴 산”으로 칭송했다는 소백산에 흰눈은 여전하지만, 소백산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죽령은 설악산 미시령처럼 새로 뚫린 터널 탓에 잊혀져가고 있다. 길 하나가 바꿔놓는 인심의 변화는 무서웠다. 미시령 초입에서 스스로 캐낸 약초며 버섯을 팔아 삶을 이어가던 약초꾼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조용한 삶을 찾아 도시에서 내려온 또 다른 이들은 새로 지은 펜션 영업을 위해 그토록 경멸했던 도시의 경쟁과 대립의 삶을 산골에서 재현해가고 있었다. 물줄기만 바뀌어도 인심이 바뀐다는 옛 사람들의 경고를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에둘러가는 길을 서두르기 위해 중앙고속도로에 올랐다. 7시간이나 걸렸던 대구까지의 길이 3시간이면 넉넉했다. 골짜기에 다리를 놓고 산에 구멍을 내 만든 길은 곧은 만큼 빨랐고 빠른 만큼 슬펐다. 모든 길이 번호로 불리는 시대에 ‘울고 넘는 박달재’도 ‘바람도 쉬고 가는 추풍령’도 잊어야 할 추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남으로 3500여 리를 달리며 13개 정맥으로 분기해 온 국토의 뼈대를 이룬다. 금대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 칠선봉 등 1천 개가 넘는 산들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백두·고두·마대·두류·금강·설악·오대·태백·소백·속리·덕유·지리 등 1천m가 넘는 고산들을 품고 있는 백두대간. 복원된 <산경표>를 따라 많은 이들이 백두대간 종주를 마쳤고 또 나서고 있다. 그들이 걷는 길은 같지만 얻는 결과는 다르듯이 백두대간은 골마다 마루금마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와 봉우리에는 거대한 백두대간 표지석이 비슷한 모습으로 세워지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지방자치단체마다 발표하는 백두대간 개발계획도 대동소이하다.

 

 

백두대간 자락에 기대어 전해온 말들

 

백두대간이 소중한 이유는 골과 능선 곳곳에 밝혀내고 계승해야 할 고귀한 민족문화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가야국 양왕의 이야기를 15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되새길 수 있는 것은 백두대간 자락에 기대어 사람들이 기억하고 전해온 말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오늘에서 끝나지 않고 내일로 이어진다. 그 흐름을 끊지 않고 이어가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 세대의 의무일 것이다. 앞으로 1년간 <한겨레21>은 백두대간을 25개 구간으로 나눠 잊혀져가는,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록한다. 사람과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는 미래를 위해.

 

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 출처 : 한겨례21, 2009.03.27 제7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