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zzWeb/인생경영

[ZDnet]착한 직원 신드롬

BUZZWeb 2008. 12. 8. 17:59

착한 직원 신드롬

이준영 (트레이스존 대표)   2006/02/02

 

 

신드롬(syndrome)이란 어떤 공통성이 있는 일련의 병적 징후가 발견되나 특정한 병명을 붙이기에는 인과관계가 확실치 않은 것으로써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회유
IMF와 벤처 붐이 동시에 몰아 닥쳤던 90년대 후반 어느 날 젊은 사장과 그보다 더 젊었던 나는 테헤란로가 시작되는 역삼동 어디 맥주 집에 마주 앉았다. 회사를 떠난다는 통지는 이미 한 후였다. 형식상 그 자리는 떠나는 자를 환송하는 것이었지만 끝내 사장은 내게 최후의 한 마디를 꺼내고 말았다,

“그래 얼마를 준다고 합디까?”
“여기보다 많이 준다고 합디다”
“말을 해 보소, 내가 더 줄 지도 모르잖아”
“끝, 쫑, the end. 술이나 드시죠”

마지막 회유에 대해 ‘메롱’ 이라 대답하며 그 순간 나는 착한 직원 신드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몇 명이 힘들게 꾸리던 영세한 벤처 기업을 벗어나 보다 큰 기업으로 옮겨 가며 이래도 되냐고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들에 대해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답했다.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착한 직원으로 살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순수 착각이었다. 나는 결국 착한 직원 신드롬을 벗어나지 못했고 수 없이 많은 회사를 옮겨 다녀야 했다.

착한 직원 신드롬이란 무엇인가?
우선 ‘착하다’는 것이 보편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 물어보든 착하다는 개념은 다르게 말하고 이해하며 행동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순간 옆에 사람이 있거나 메신저에 로그인한 친구가 있다면 이렇게 물어 보라,

“너는 착한 게 뭐라고 생각하니?”

좀 진지하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대부분 이런 질문에 대해 돌아오는 대답은 하던 일이나 계속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어제 애인과 헤어진 사람이라면 ‘착한 건 남을 괴롭게 만들지 않는 거다’라고 대답할 수 있고, 주식 애널리스트의 분석에 속아 고가에 매입했다 주가가 바닥을 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분수에 맞게 사는 거다’ 라며 담배를 빨아 댈 수도 있고 방금 냈던 기획 안이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고 돌아 온 동료라면 ‘김 부장 빼곤 다 착해!’라고 대답할 지도 모른다. 착하다는 개념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상황적이다. 그러나 분명히 회사에는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진 사람이 있다. 공통된 병리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묶어서 ‘착한 직원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행태가 존재한다.

착한 직원 신드롬의 현상은 다음과 같다.

- 착하게 살면 세상도 보답을 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특히 회사에 대해
- 자신이 착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고 말한다
-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월등히 뛰어난 성과를 거두거나 과도하게 칭찬을 받으면 나쁜 놈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 그런 생각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상대방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깊은 공감을 느낀다
- 착하기만 한 자가 오래 회사를 다니는 것은 조직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조직을 망치는 것이라 비판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 누군가 자신을 착한 자라 말하면 기분이 좋지만 가끔 나쁜 자라 말을 듣고 싶기도 하고 결국 착한 것과 나쁜 것이 뭐가 뭔지 잘 모른다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나 말하는 내용이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착한 것의 반대가 나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착한가? 아니면 나쁜가?’ 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착한 자가 되거나 나쁜 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져 버린다.

착한 직원 신드롬의 문제점
조직에 있어서 착한 직원 신드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멍청한 직원을 대량으로 양산한다는 것이다. 착한 것과 일을 잘 하는 것, 매출을 잘 올리는 것, 고객 응대를 잘 하는 것,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착한 직원이 회사에 안정적으로 오래 근무하는 현상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부당함에 분노한다. 착하고 무능한 직원이 유능하고 나쁜 직원을 몰아내는 것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혹은 회사가 정말 원하는 것이 훌륭한 성과를 내는 직원인 지, 조직에 순종하며 보편적인 성과를 내는 직원인 지 혼동하게 된다. 결국 바보들만 잔뜩 남은 조직을 떠 올리게 되고 지금 내가 근무하는 회사가 돌아가고 있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도 지금 거기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 착한 직원 신드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직원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착한 직원만 남게 되고 나쁜 직원은 떠나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그 착한 직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이런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착하다’는 것에 대해 잘못된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혹은 과민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무한 경쟁 관계의 회사에서 오래 근무할 수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다.

- 회사 내부적으로 기여한다. 매출이든 조직 관리든 뭐든 간에 회사의 이익에 기여한다.
- 회사 외부적으로 기여한다. 유명인이든 투자 자금을 끌어 오든 뭐든 간에 회사 외부의 브랜드를 향상시키고 이익에 기여한다.


딱 이 두 가지다. 그 외에 어떤 것도 회사에 오래 근무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칙 이외에 회사에 오래 근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투자자거나 사장이거나 지분을 소유한 경영진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친한 사람도 그렇다. 심한 경우 대체 인력이 없어서 오래 근무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원칙에 따라 흘러가지 않듯 회사도 그렇다. 그럼 이것이 딜레마의 근본적인 이유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착한 직원이 오래 회사에 근무하는 주요한 이유는 원칙과 다른 형태로 생존하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에게 있다.

왜 착한 직원이 생존한다 생각하는가?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착한 직원이 오래 회사를 다닌다’고 믿고 있으며 심지어 ‘착한 직원이 능력과 무관하게 인정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이 문제일까? 아니다. 이미 이야기했듯 그것은 현실이다. 능력이 뛰어난 기획자가 잘리고 그보다 능력이 뒤지는 기획자가 남아 있기도 하고 이런 현상은 모든 직종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 직언하는 사람보단 뒤에 물러서서 지켜보는 사람이 회사에서 오래 근무한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그런 이유로 회사를 그만뒀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회사에서 고통 받거나 힘들거나 혹은 회사를 그만 두는 이유에 대해 좀 더 냉정해 질 필요가 있다. 착하지 못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매우 많다. 어쩌면 당신의 마케팅 능력이 뛰어나며 어쩌면 당신의 직관과 기획력은 뛰어나며 당신의 미적 감각과 고객 응대에 대한 마인드는 뛰어날 지 모른다. 그런데 왜 그것을 인정 받지 못하는가?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은 당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 – 대개는 경영진이나 당신의 상사다 – 이 당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능력보다 다른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영진이나 상사는 당신의 능력보다 조용한 조직을 원할 수 있으며, 당신의 직언보다 칭찬을 원할 수 있으며, 당신의 아이디어보다 복종을 원할 수 있다. 당신은 그런 요구가 자신을 죽인다고 생각한다. 능력과 직언과 아이디어가 통하지 않는 조직의 요구에 복종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은 ‘나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요구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근데 왜 나는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세상 살기 힘드니까”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착한 직원이 된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함을 깨닫게 된다. 스무 살에 직장을 옮기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서른 살 보단 상대적으로 쉽다. 마흔 살은 훨씬 더 어려우며 그 이후엔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또한 비난한다고 자신에게 적절한 답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공산 혁명가 모택동이 왜 10대들이 대부분인 홍위병을 구성했겠는가? 애들은 뭘 몰라서? 그들에겐 살아 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길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착한 직원 신드롬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연계에서 대부분의 포획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명확히 한 후 그것을 확장하지 않는다. 반경 10km 이내를 자신의 영역으로 설정한 사자는 그 영역을 확장하는 대신 안정적으로 그것을 유지하는데 주력한다. 침입자가 존재하는 것은 영역을 확장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먹이를 구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의 사자가 침입해 오기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포획자들과 달리 침략 욕구가 있다는 것은 좀 혼란스럽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침략보다는 안정을 원한다.

착한 직원 신드롬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에서 그 근본을 찾을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어떤 직장이 평생을 보장한다면 어떤 행태를 취할 것 같은가? 최근 일본의 한 중견 기업인이 “일본의 평생 직장 개념이 일본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지난 십 몇 년 동안 일본 경제계를 뒤흔들었던 구미의 경쟁 구조에 대해 반대해왔고 그 결과 다시 일본의 경제가 살아나게 되었다 주장했다. 이게 옳은 이야기인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인간이 끊임없는 투쟁과 경쟁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진시황, 십자군, 히틀러도 모두 동일하게 ‘평화’를 이야기했다. 미국도 말로는 세계 각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라는 평화를 심어준다 하지만 끊임없는 분란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침략을 했던 자들 조차 원하는 것은 영원한 평화였다. 히틀러와 나찌당이 수 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유태인은 평화를 가로막는 즉 자신들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사라지면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 믿었고 결국 인류 역사 상 가장 잔인한 폭력을 자행했다.

착한 직원 신드롬을 알렉산더에 나찌에 미국까지 확대를 하니 억지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그런 신드롬이 단지 당신 자신의 특별함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잘 언급되지 않고 고려되지도 않는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안정되고 평화롭고 그리하여 미래를 예측하며 살고 싶은 인간의 속성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착한 직원’이 무엇인 지, 혹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나쁜 직원’이 무엇인 지, 그것이 나를 어떻게 바꿀 것인 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직원 신드롬에 빠져 있는 자신에 대해 좀 더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착한 직원은 없다
착한 직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언가에 적절히 부합하는 직원일 것이다. 적절한 직무 능력과 적절한 조직 관리 능력과 적절한 언변과 적절하게 처세하는 방법을 아는 직원을 착한 직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적절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 기준에 부합하면 누구나 착한 직원이 될 수 있다. 매년 연봉이 오르고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원이 점점 더 늘어가고 어쩌면 계속 승진을 하여 이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위해 당신은 조직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해 내야 한다. 그것이 착한 직원이라면 착한 직원이다.

이런 착한 직원이 되고 싶다면 그 방법은 너무나 평범하고 도식적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다. 몇 가지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세상과 조금 타협하고 착한 직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행위들 자체를 경멸하지 않으면 된다. 아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되어 버린 자신의 삶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그래야 정말 ‘착한 직원’이 될 수 있고 경영진까지 승진할 수 있다.

만약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착한 직원이 되기엔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착한 직원이 되는 대신 착한 경영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전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착한 직원이 되는 대신 스스로 그런 사람을 받아들일 것인 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착한 아들 신드롬
내가 스물 두 살이 되던 해에 경찰서 문지방에서 데모를 하다 잡혀 간 적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이 애매하여 훈방이 아니라 실형을 받을 처지에 놓였는데 이틀 만에 검사 앞에서 잔소리 한참 들은 후 풀려 나왔다. 정적이 가득한 집에 돌아와 있는데 아버님이 나를 불렀다. 동네 동사무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시며 내가 빠져 나온 사연을 이야기하셨다. 먼 친척 중 검사가 있었고 나를 빼 내기 위해 지난 이틀 간 동분서주하며 고개를 숙이고 다니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 가를 물어 보셨고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 울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세상에서 가족이란 게, 아버지란 존재가 어떤 것인 가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0여 년 간 내가 착한 직원 신드롬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가장 컸다.

며칠 전 아버님이 설 전에 전화를 하셨다. 잘 살고 있냐?고 하시길래 걱정 마시라고 했다. 이제는 할 수 없는 할아버지가 되어 버린 아버님께 나는 더 이상 “착한 직원”은 아니다. 하지만 끝까지 싸우는 아들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게 결코 착한 직원이 되지 못하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아닐까? @

 

 

 

* 출처 : ZDnet, [이준영] 오피스정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