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메시아적 게발트가 하는 일
사라마구의 장편소설 <빛의 향연>에 나오는 '백지투표'에 관해 쓴 글. 앞질러 한 단락을 뽑아 놓는다.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누구보다 예민하게 총리는 백지들에서 한 정치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본다. 총리에게 백지는 대의제를 지탱하는 투표과정 그 자체를 파멸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씨앗들’이었다. 그 씨앗은 선거라는 정상적 절차의 온실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길러진 비수였다. 자신만만한 내무장관은 말했었다. 조직된 합법적 폭력의 사용권을 독점한 국가는 결코 그 비수들과의 칼부림에서 지지 않는다고, 진다면 세상이 끝나버리게 될 것이므로 결코 질 수 없다고. 총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답한다. “아니면 세상이 시작될지도 모르지.” 백지의 게발트에 의한 붕괴와 파국이 어쩌면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것. 총리는 우리의 제헌권력을 우리보다 더욱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총리는 우리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욱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당의 갱신과 대의의 쇄신이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그것이 지금 당장 실천 가능한 실효적 과업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누가 세상의 끝과 세계의 새로운 시작이 붕 뜬소리라고 말하는가. 누가 역사의 산파에서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무엇이 현실적이며 무엇이 관념적인가. 무엇이 과학적이며 무엇이 공상적인가. 확실한 것은 총리에게, 사목되는 삶이 누리고 구가하는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동의 적인 바로 그 총리에게 백지들에 의한 대의장치의 파국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은 관념이나 공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총리에게 백지의 게발트는 리얼한 것이었다. 지상과의 고리를 잃은 천상의 노래가 아니라 지상에서 관철되는 지고한 의지의 효과였다. 우리가 총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 거듭 제기되어야 할 근본적 입장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 겨울호 <자음과모음>에 기고했다. 여러모로 감사하다. 동시에 여러모로 주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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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에 관하여―메시아적 게발트가 하는 일
序: 오늘의 신성국가
시민이란 무엇인가. 여기 시민에 대한 하나의 정의가 있다. 시민은 전기다. 이 정의는 격랑과 파란을 예고하는 기이한 한 구절로 이끌려 들어간다. “시민이라는 전기가 정전된 사태”.[주제 사라마구,『눈뜬 자들의 도시』(원제 ‘빛의 향연’), 정영목 옮김, 해냄, 2007, 13쪽. 이하『빛』으로 바꿔 쓰고 쪽수만 표시.]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말년의 자기붕괴를 거듭 감행하고 있는 작가 사라마구는 시민이라는 전기로 작동하는 시스템의 정지에 대해 깊이 몰두했다. 그가 그려놓은 한 도시에서는 40여개의 투표소에서 지방자치의 대표들을 뽑는 선거가 치러지고 있다. 오전부터 쏟아진 빗속에서 투표율은 오후 4시까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부터, 저항할 수 없는 명령과 이상한 충동의 힘을 따라 시민들은 투표소로 꾸역꾸역 몰려갔다. 그들은 진군하는 파도였다. 자정에 끝난 개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익정당 13%, 중도정당 9%, 좌익정당 2.5%. 무효표 또는 기권표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70% 이상의 표들은 어디로 갔는가. 투표함 안에 고스란히 있다. 있는데, 모두 다 백지인 채로 있다. 백지는 무효가 아니므로 실효이고 기권이 아니므로 기적이다. ‘기권의 반대말은 기적입니다’라는 카피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어떤 기대를, 투표하면 세상이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그 백지들은 다르게 수행한다. 백지들은 투표용지에 구획되어 있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후보들을 찍지 않음으로써 합법이 불법이거나 탈법적인 것이며 정당함이 부당함이거나 파당적인 것임을 고지한다.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온 백지는 자기들의 인식과 감각과 행동을 미리부터 결정짓는 구조 그 자체에 대한 불신임의 의지이며, 그런 초월적이고 신성한 구조를 설계한 자들의 조절하는 조작의 힘을 거절하는 불복종의 힘이다. 이 지점에, 이 도약가능성의 발판에 기적이야말로 기권의 반대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이 있다. 현대국가론의 핵심어들이 ‘세속화한 신학적 개념’(슈미트)이라는 논지 또는 의지. 다시 말해 느낌과 인지와 표현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대의의 시스템이 일상적 삶 속으로 연착륙한 신학 개념과 합성된 어떤 신성국가적 포획장치라면, 그리고 그 장치가 자신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늘 함께 삶을 재편성하고 재주조하는 ‘세계의 세속화된 신’(짐멜)으로서의 화폐장치와 합성된 것이라면, 그렇게 합성된 채로 무한히 증식하는 신성의 폭력들을 끝내는 힘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또 다른 신성의 힘이어야만, 그런 힘의 발생적 현현이여야만 하지 않을까. 사라마구의 백지들, 그 기적 같은 도래의 순간을 꽉 채우고 있는 힘(Gewalt)에 대해 거듭 묻고 답하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신성한 사냥꾼들’(마르크스)과 싸우는 신성한 힘의 다른 질감이었던 것이다.
“파국의 짐”
받아든 투표용지 한 장. 그것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몇 가지 일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매번 기계적으로 받아들고 악순환적으로 찍게 되는 그 한 표가 민주주의라는 외투를 걸친 관리자의 힘의 현신이라는 사실을 낯설게 감각하는 일, 그럼으로써 가상의 주권재민이 실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상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힘을 사고하는 일, 그 힘에 민주주의가 때로는 은밀히 때로는 대놓고 합성되고 있음을 지각하는 일. 줄여 말해, 민주주의가 대의제의 원천이자 시녀로 되어 있는 사정의 이면을 직시하는 일. 남측의 경상북도에서 6만표를 얻는 데 성공하면 장차관 자리 하나는 거뜬하다는 오늘의 말, 지방 선거조직 하나를 굴리는 데 1억 5천 만원치의 윤활유가 들며 선거 승리 후 5000개가 넘는 자리가 득표수에 따른 논공행상으로 곳곳에 뿌려진다는 어제오늘의 농담 같은 진담. 그 말들이 암시하는 바로 여기, 이 구조적 실황 속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로 하자. 사라마구의 백지들은 어떤 무기로 재설계되어야 하는가.
70%의 백지표를 일시적 일탈이나 단순한 판단착오 쯤으로 이해한 대의장치의 운용자들은 마냥 재선거만을 외친다. 그러면서 한 입 크기의 아기자기한 위기와 긴장을 즐긴다. 중앙정부의 총리는 재투표를 통해 시민들은 예전의 위엄과 예의를 되찾을 거라고 확신한다. 힘 들어간 목 위에 얹힌 총리의 엄숙한 얼굴이 ‘시민의 의무’ ‘시민의 의무’라며 연거푸 그 입을 놀린다. 총리의 바로 그 ‘시민의 의무’ 곁에 ‘의무의 희생자’를 병치시킴으로써 의무라는 가상의 파기에 대해 더 사고하기를 요청했던 건 이오네스코였다. 재선거 결과, 수도의 모범적인 시민들에게서 쏟아져 나온 백지투표는 83%에 달했다. 총리의 확신은 깨졌다. 그는 긴급히 내각 회의를 주재했고 TV에 나와 그 결과를 발표했다. 내각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 기본권 제한의 피해자는 전부 시민들이 될 거라는 것, 그렇게 되기 전에 광기 어린 절대악의 전염상태로부터 한시 바삐 벗어나 회개하라는 것,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중앙 정부는 회개한 자들을 용서함과 동시에 다시금 정상적으로 국가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거라는 것.
합법적 정당들로서 지난 선거보다 더욱 초라한 득표율을 기록한 우익, 중도, 좌익 정당들은 총리의 담화를 각기 아전인수 격으로 오독한다. 우익은 기라성 같은 배우도 울고 갈 총리의 일품연기를 극찬하면서 당근과 채찍의 변증법이 갖는 실효적 힘을 찬양한다. 그들은 그들 내부에 있는 순진한 평화주의적 분파를 상대로 밀고 당기면서 당원들로 하여금 팽팽한 긴장상태 속에서 5분대기조로 혹은 기동타격대로 스텐바이하고 있기를 주문한다. 중도정당은 자타가 공인하는 원내 유일의 수권야당답게 총리 연설의 주요 뼈대에 동의를 표하고 백지투표의 배후 음모자를 수사해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그러면서 모든 정당대표들이 모인 구국내각을 구성해 백지의 창궐이라는 비상사태를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때 그들이 내걸고 있는 ‘민주적’이라는 푯말은 여당이 독점한 노른자위 권력을 합리적 공개토론을 통해 나눠 갖자는 의지의 의장(意匠)이라고 해야 한다. 좌익정당은 백지투표가 국가 전복의 목표를 지닌 것이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그 백지들은 결국 양당 구조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좌익 정당의 진보적 정강 실현에 대해 표한 거대한 열망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성명을 준비 중이다. 이른바 합법적 정당들 모두는 거덜난 득표율을 표시하는 쪼그라든 막대그래프를, 그 반토막난 거세의 실황과 상흔을 외면함으로써 급기야 복구불능의 완전한 폐절의 순간과 마주한다. 중앙정부의 내각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진 않다.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운행되는 그들 대의의 시스템은 임박한 “파국의 짐”에 의해, “거리의 권력”(『빛』, 81, 82)이 내리누르는 하중에 의해 압살된다. 대의제의 어깨를 짓이기는 파국의 그 하중은 어떤 역사적 유물론의 힘으로 일렁이고 어른거린다. 무슨 말인가.
여기 적대하는 두 선조의 영혼이 있다. 지배의 계보 맨 위에 있는 선조와 피칠갑을 한 채로 도약하는 호랑이 같은 선조(Tigersprung). 계엄령을 수행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게 총리는 자신의 선조들이 사랑했던 표현을 빌려 말한다. 당신들에겐 길 잃고 부유하는 양떼를 다시 울타리 안으로 인도하는 애국적 책무가 있다고. 총리와 그의 선조들의 힘을 대행하는 두 장관은 대의를 거절하는 시민들을 적이 아니라 단순한 반대자로, 공모하는 이탈자로, 시스템의 비판적 파트너로 치환하고 포획하는 숭고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비상사태 하의 내각을 향해 총리는 말한다. “신이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여러분의 발길을 인도해 주시길, 그래서 다시 일치의 태양이 우리 동료 시민들의 양심을 비추고 평화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사라져버린 조화를 되살려 주길 기원하는 바입니다.”(『빛』, 85) 사라마구는 희망하면서 그 희망의 도래를 목격하는 중이다. 국가적 통합과 일치의 태양을 꺼트리는 진정한 빛의 향연을, 일원성을 목표로 치달리는 권력의지의 조화를 영구히 파탄내는 불화의 갱신을, 조화의 태양을 보수하고 보존하는 총리의 신을 쏴죽이는 진정한 신의 폭력을, 줄여 말해 83%의 백지투표 그 불복종의 파루시아를. 그렇게 임재하는 힘들이 바로 저 도약하는 호랑이/선조들의 힘이다. 한 투표참관인은 투표소로 밀려오는 시민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숭배하는 영령들이 되살아나 투표용지들로 현신하는 것 같다고. 지배자의 뜻과 입맛에 따라 국가의 만신전에 오른 선조들이 지배의 뜻과 입맛을 거슬러 오늘 이곳으로 틈입함으로써 생환(生還)하고 있는 한 순간. 그렇게 도약하는 선조들에 의해 총리의 선조들이 쌓아올린 국가의 제단은 난장이 된다. 바로 그 도약의 도상에서 대의민주주의라는 신성한 가치의 등뼈는 조금씩 부러뜨려진다. 대의의 시스템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영토와 불화하는 선조들/백지들, 이른바 과거와 오늘의 피를 합수시키는 역사적 유물론자들. 그들은 ‘무성(無性)’의 존재다. 무슨 뜻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아예 천도하려는 정부가 야음을 틈타 수십 갈래의 도로로 일사분란하게 도망치려는 바로 그때, 농담 같은 진실과 진리로 길가의 모든 건물 모든 방들에서 전등이 켜졌고, 모든 창문들로 뛰쳐나간 그 빛의 격랑은 도로 위의 정부를 대낮 같이 씻기고 밝혔다. 총리는 영혼까지 떨려오는 불안에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정부는 도로 위에 그대로 멈춰섰다. 총리를 더 곤혹스럽게 했던 건 창문 곁에 아무도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으며, 수모를 당한 계엄의 주권이 일벌백계할 적들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주어진 정체성을 거절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니게 된 이들이 때때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듯, 할당되고 부과된 장소를 기각함으로써 아무 데도 없게 된 이들이야말로 모든 곳에 있다. 아무 데도 없으므로 어디에든 있다. 신이 그렇다. 신에게 부재와 편재는 동시적이며 등가적이다. 사라져 없어진 그 무성의 상태는 어디든 있는 신성의 조건이며 신의 힘의 기반이다. 칠흑 같은 도로 위의 정부가 창백하게 얼어붙었던 바로 그 순간, 돌려 말해 비상사태를 결정했던 주권자를 포위하고서 그 주권의 운용을 정지시키는 파국을 고지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무성의 신인(神人)이다. 그들 새로운 인간(新人)이 ‘최후의 인간’(후쿠야마)과 끝없는 축적을, 그 자유의 왕국이라는 신성한 통치의 힘을 폐하려 한다.
백지투표―신성한 화염들
총리가 자기 선조의 말에 기대어 시민이라는 양떼를 안전하게 돌봐야 한다고 장관들을 일깨울 때, 총리와 그의 선조는 이른바 ‘사목권력’의 계보를 예증한다. 총리와 선조의 연합한 사목권력을 대리 집행하는 장관들(Minister)은 이미 신성한 사냥꾼들의 숭고한 명령을 섬기는 성직자(Minister)에 다름 아니다. 총리는 시민이라는 양들의 행실과 품행을 계도하는 목자(牧者)를 한가로이 펼쳐진 목가적 풍경 안에 놓아두고 있지만, 실상 그 풍경의 본질은 사회와 삶의 체계적 파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가적 목자에 의해 고요하게 숨지고 있는 그 살풍경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인용해야/빼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무릅쓰고 인용하는 한 대목은 푸코의 것이다.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를 저는 ‘통치성’으로 이해합니다.[미셸 푸코,『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163쪽]
1978년 2월 1일자 강연에서 푸코가 했던 말이다. 그는 근대 국가를 근대 국가이게 하는 통치적 합리성의 계보를 밝히면서 먼저 ‘인구’를 그 핵심요소로 꼽았다. 당연하고도 자명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구, 새로운 집합적 주체로서의 인구가 통치의 궁극적 대상이자 최종목표로 인식되면서도 동시에 알아서 처신하는 활동적 주체가 되기를 요구받았던 과정은 근대 국가 이전의 지배체제를 떠받쳤던 사고 및 실천과는 너무도 이질적이며 단절적이라는 것. 16~17세기에 등장한 직업적인 정치가들이 통치적 합리성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고안한 인구는 통치의 메커니즘에 의해 북돋워지고 조절되고 관리됨으로써 통치자들의 입맛에 최적화된 주체들을 생산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83%의 백지들을 던졌던 수도의 인구는 총리와 그의 선조라는 통치자, 그 온화한 목자들의 입맛에 전혀 맞지가 않다. 백지투표는 저들 목자들의 입맛을 아예 잃게 만들며 다시는 입맛 다시지 못하게 한다. 총리라는 목자는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내도록 인구라는 양들 하나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손수 먹이면서, 늑대들의 으슥한 밤으로부터 양들 전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선다. 그런 한에서 총리의 사목은 균형 있게 안배하고 안전하게 배려하는 권력의 기술이자 절차이다. 백지들은 사목적 기술이라는 배려의 통치를, 양떼의 구원이라는 신성한 목적의 추구 속에서 수행되는 ‘내치’의 운용을 정지시킨다.
푸코는 근대적 통치국가의 모범이자 모델이었던 사목적 구조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경제 위기의 문제와 종교적 구원의 문제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준칙으로 이해한다. 경제 위기와 사목권력은 인구 개념의 설계도 속에서 연결되고 또 교환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려하는 통치의 이면을 다른 각도에서 개시한다. 이는 18세기 전반의 경제학자들이 옹립하려고 했던 것이 ‘자유’였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그들이 고안한 통치적 합리성 혹은 국가이성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다. 통제화가 아니라 자유화. 개인의 행복과 국력에 백해무익한 통제화가 아니라 국가 간 통상의 자유와 개인들 간 경쟁의 자유. 사람과 사물과 사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그대로 방임하며 내버려두는 것, ‘보이지 않는 손’의 자연스러움이 관장하는 흐름과 순환의 자유, 자연스러운 자유. 푸코는 인위적 관계로서의 경쟁의 자유가 새로운 자연이 되게끔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전능한 힘을, 그 편재하고 신성화된 조절적 힘이 가져다 줄 개인의 행복을 곧바로 국력 그 자체로 되게 하는 통치이성의 의지를 기각하려 한다. 다시 말해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이성의 기원과 태동에, 그런 국가이성의 입맛을 자신의 입맛으로 욕망하는 개인들의 품행에 계보학적 볼록렌즈의 빛을 내리쪼이는 중이다. 그 빛에 의해 생산?유통?소비라는 회전과 순환의 자유를 삶의 피할 수 없는 필연적 토대로 인식하고 확증하는 ‘정치경제학’이라는 지식-권력 또한 불타려 한다. 이제 푸코가 말하는 ‘안전장치’의 목표는 그런 볼록렌즈의 초점화된 빛으로부터 자유라는 필연적 통치성의 ‘사회’를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된다. 자유에 대한 봉헌의 시스템. 폭력의 안전장치로 변용된 경찰권력이 신성화된 자유의 왕국을 우러러보며 그런 봉헌의 미사를 집전한다. 봉헌의 장치 또는 미사의 정치. 그 사목의 네트워크를 불태우는 사라마구의 반(反)-사목적 백지들.
* 표(票)라는 표상의 시스템. 가장 악독한 걸 피하기 위해 그나마 덜 표독스런 걸 찍는, 그럼으로써 각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선’을 체계적으로 장사지내는 일에 동참케 하는 한 표의 매트릭스. 거기로 옮아붙어 구멍을 내고 번지며 퍼지는 불똥(票) 같은 백지들, 신성한 화염들. 백지들은 당의 관료화, 당의 사목화, 곧 권력의 사목화에 의해 부과된 품행들을 거부하는 불복종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백지들은 반-사목적 ‘대항품행’의 날카로운 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받고 싶지도, 그런 수단으로 구원받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항구적으로 심판하고 우리의 근저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즉 우리가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혹은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를 말하는 이런 항구적인 관찰과 시험의 체제에 포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구원의 사목제도 일반을 겨누며 푸코가 빼들었던 건『수용소 군도』의 솔제니친이었다. 그때 거기처럼 오늘 이곳에서의 삶은 누리고 구가하는 삶이 아니다. 기쁘지 않고 좋지 않다.
반-사목적 대항품행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쿠데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출될 수 있다. 푸코의 분석 속에서 쿠데타는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매만지는 자유의 국가가 구원이라는 것을 사고하고 수행하는 폭력적 절차로 드러난다. 17세기 초의 쿠데타는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국가의 소유권을 몰수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상적인 법적 절차의 상궤를 위반함으로써, 합법성을 박탈하고 중단시킴으로써 통치한다는 뜻이었다. 통치를 수행하는 각 부문들끼리의 알력, 상충, 결렬, 경합, 야합, 합의라는 통치의 비용과 지체와 비효율을 단번에 철폐하는 통치이성 최고도의 실천. 그것이 쿠데타다. 쿠데타는 국가 위기에 대한 결단과 그것을 처방해야 하는 필요성에 따라 드러나게 되는 국가이성의 맨몸이다. 그런 국가적 긴급사태에 대한 단언, 결정, 결단의 필요성을 밑바닥에서부터 규정하는 것은 국가의 구원이라는 사목적 당위였다. 쿠데타라는 사목권력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중지시키고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킨다. 푸코는 통치성의 절차를 구성하는 ‘내치’를 항구적인 쿠데타로 정의함으로써, 법의 중지라는 예외적 상태가 통치의 일상적 지속을 보증하고 있는 오늘의 주권을 비판한다. 푸코에게 통치는 합법적 상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합법성을 중단시킬 수 있는 ‘필요성’ 속에 있다. 필요성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푸코가 인용한 17세기 초의 한 대목. “필요성의 힘은 대단히 크기 때문에 여신(女神)의 주권, 그 철회불가능한 선고의 견고함보다 더 신성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필요성은 법을 침묵하게 만든다. 필요성은 모든 특권을 중지시키고 만인을 복종시킨다.”[『안전, 영토, 인구』, 361쪽.] 인구는 법을 중단시키는 신적 주권의 선포 속에서 복종한다. 그 복종의 삶은 무제한적이고 보존적인 통치의 시간이라는 근대적 국가이성 특유의 시간기획 속에 들어 있다. 이제 다시 묻고 답하자. 대항품행이란 무엇인가. 항구적 통치의 시간을 끝내는 힘이다. 끝을 배제하는 자들에게 끝을 대치시키는 태도, 끝없음을 끝내는 삶이 대항품행이다. 그것은 최후의 시간의 도래, 이른바 메시아적인 것의 임재와 맞닿아있다.
국가이성의 새로운 역사성은 최후의 제국, 즉 종말론의 왕국을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16세기 말에 정식화된 이 주제, 물론 지금도 남아 있는 주제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시간이 끝을 맞는 때가 도래할 것이라고 긍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대항품행, 즉 종말론, 최후의 시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간의 박탈, 완료의 시간, 소위 국가의 무제한의 통치성이 정지되는 시간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대항품행이 발전하게 됩니다.[『안전, 영토, 인구』, 481쪽.]
사라마구의 백지들을 대항품행의 예리한 예라고 했던 근거가 위에 있다. 푸코는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시민사회가 통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해석함으로써 그 명령 안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개입시킬 때, 그럼으로써 통치의 배려와 후견과 한계를 뛰어넘게 될 때 근대적 통치성의 무한한 시간이 정지된다고 말한다. 19~20세기를 관통해온 ‘혁명적 종말론’의 이름으로 푸코는 국가권력이 시민사회 안으로 흡수되는 상황에 관해, 시민사회를 국가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는 종말론에 관해 언급한다. 그것이 대항품행의 첫 번째 주요 형식이다. 그런데 푸코는 사목권력과 그것을 재분배하고 전복하고 실격시키는 대항품행 사이에 상호 지지와 교환의 관계가 성립해 있음을 지적한다. 사목권력의 역사가 대항품행의 여러 층위(수덕주의, 공동체, 신비주의, 종말론, 성서로의 회귀)를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로 재도입함으로써 순치하고 전치했었던 과정인 한에서, 국가권력에 시민사회를 대치시키고 국가에 인구를 대결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마주하면서 푸코는 불복종의 가능성을 통해 종말론적 대항품행을 다시 비춘다. 인구가 국가와의 복종적 관계를 자를 수 있는 권리를 손에 넣는 때가 틀림없이 도래할 것이라고 하면서 푸코는 말한다. “여기서 종말론은 반란이나 모반이라는 형태, 온갖 복종적 연결고리의 단절이라는 형태와 관련된 절대적 권리라는 형태를 취합니다. 이 권리는 혁명 자체의 권리입니다. 이것이 대항품행의 두 번째 주요 형식입니다.”[『안전, 영토, 인구』, 482쪽.] 사목과 대항품행 간의 교환 관계를 절단하는 절대적 불복종의 권리, 통치성을 폐절시키는 그 신성한 게발트의 수행(Gewaltpraxis)은 푸코에게 머릿속의 개념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1978년 9월 8일 ‘검은 금요일’의 이란과 푸코, 이란의 푸코.
르포르타주―이념의 탄생과 폭발을 목격하는 방법
1970년대 미국의 중동정책 아래에서 이란의 석유 이윤은 팔레비 국왕 및 그 측근들과 외국 기업들에게로 넘어가고 시장 상인은 파산했으며 농민은 건설노동자로 전락했다. 독재와 치안 강화 속에서 추진된 지속적인 미국화 과정은 반민주화, 공공영역의 민간화, 빈부격차, 이슬람 전통의 파괴를 가져왔고 팔레비 왕정은 서로 상충하는 여러 계급과 계층들, 예컨대 중소 부르주아지, 대지주, 노동자, 농민, 좌파,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 등에게서 터져 나온 저항에 직면했다. 그렇게 상충하는 저항의 교류처가 대(大)아야톨라의 칭호를 받고 있던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였다. 검은 금요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도 테헤란 잘레 광장에서 시위하던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신국(神國)으로서의 ‘이슬람 공화국’을 내걸었던 거대한 격랑이 있었고 팔레비는 1979년 1월 이란을 떠났다. 1964년 이래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가 돌아옴으로써 이란혁명은 완수됐다. 호메이니는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 이슬람 율법학자들(파키흐)에 의한 통치를 내세웠고, 일면 초의회적이고 초법적이라고 해야 할 헌법감시평의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 힘을 밑바탕으로 냉전의 분할체계에 격렬하게 맞섬으로써 제3세계의 입장 하나를 선연하게 표현했으며, 미국의 비호를 받던 이라크와의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내부의 세력관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재편했다. 보복의 공개처형이 있었고 투옥과 탄압이 있었다. 서양음악과 술이 금지되었고 이란의 여성은 다시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호메이니가 수행했던 사목적 전권이 혁신과 파괴의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했다.『안전, 영토, 인구』와『생명관리정치의 탄생』사이, 그 두 번의 연속적 강의 사이에 푸코는 이란에 있었고, 르포를 썼다.
「이념의 르포르타주」(1978. 11. 12)에 푸코는 이렇게 적었다. “이념들의 탄생에 참여해야 한다. 그 힘의 폭발을 목격해야 한다.”[『안전, 영토, 인구』, 502쪽] 어떤 이념의 탄생에 개입해야 하는가. 이란인들이 폭발시키는 정치적 봉기의 이념에 개입해야 한다. 그 폭발의 뇌관이 바로 임재하는 메시아로서의 ‘숨은 이맘’에 대한 믿음이었다.[‘인도하는 자’ 또는 ‘모범’을 뜻하는 이맘(Imam)의 도래에 대한 신념은, 12번째 이맘으로 874년 신에 의해 ‘은폐의 문’ 뒤로 숨겨진 마흐디(mahdi)의 재림에 대한 믿음과 다르지 않다. 구세주 마흐디는 ‘올바로 인도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른바 진정한 사목의 게발트. 그것이 이란혁명의 요체였다. 아라비아 지역의 유대 신비주의 및 기독교의 종말론적 메시아사상에서 영향 받아 재구성된 마흐디즘이 이슬람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85년의 반(反)우마이야왕조 운동 때이다. 그 후 마흐디즘은 시아파 최고지도자로서의 ‘무오류의 이맘’ 관념과 결합함으로써 핵심적인 교의가 된다. 일반적으로 마흐디는 학정과 억압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는 이슬람적 천년왕국운동의 지도자로 드러난다. 19세기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들 중에서도 마흐디가 통솔했던 수단의 예가 있다. 1979년 이슬람 성지 메카의 성 모스크 점거 사건 또한 마흐디의 통치를 요구했던 불복종의 표현이었다. 이맘/마흐디에 대해서는, 국제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왜곡된 이란상을 비판하면서 이란에 대한 ‘독자적 시각’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유달승의 논문들 중「시아파 정치사상의 특성 연구」(『한국이슬람학회 논총』, 18집, 2008)를 참조.] 푸코는 호메이니가 주장했던 율법학자들의 통치에서 호메이니의 독재를 보았던 자유주의적 시아파 지도자 마다리를 만났고, 숨은 이맘을 기다리면서 매일 ‘좋은 통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마다리의 말에 기대어 ‘이슬람의 통치’에 대한 르포를 썼다. 이슬람의 통치는 성직자의 독점적 지도력을 따라 인도되는 정치체제에 대한 거절의 힘이며, 현실의 폭압에 대한 혁신적 응답으로서 이슬람의 전통적 사회구조의 정치화이고, 정치적 삶에 ‘영적 차원’을 개방하는 것이었다. 그 르포의 제목은「이란. 이맘을 기다리며」였다(1978. 10. 8). 그것은 반사목적 대항품행에 관한 강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좋은 통치를 곱씹으며 사고하던 그때 푸코는 사회학 교수 샤리아티의 행동과 입장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의 페르시아어 역자이자 투옥과 망명과 강의로 이름난 샤리아티는 알제리의 파농이나 벤 벨라와 같이 세속과 신성, 마르크스와 무함마드를 결합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이란인들은 무엇을 꿈꾸는가」(1978. 10. 16)에 기록된 이란인들은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위기 이래 그 가능성이 폐기되었던 ‘정치적 영성’을 온몸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푸코는 그런 정치적 영성과 신성의 정치력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비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한참이나 틀린 것이라고 적는다. 이후 호메이니 신체제의 준군사집단에 의해 반대자들이 처단되기 시작할 때 혁명을 지지한 푸코는 좌우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게 된다. 그런 드센 비판들에 선언의 형식으로 응답한 글이「봉기는 무용한가?」(1979. 5. 11)였다. 이에 기대어 쓴『안전, 영토, 인구』의 책임편집자 셰넬라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큰따옴표 안의 문장들은 모두 푸코의 것이다.
푸코는 일체의 역사적 인과성과 관련해 봉기는 초월성을 가진다고 단언하면서[“들고 일어서는 사람은 결국 설명될 수 없다.”] “교조적인 성직자의 잔인한 통치”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기댄 영성”을 대치시키고 있다. 봉기란 “역사의 흐름을 막는 단절”이며, 이것에 의해 역사에 ‘주체성’의 차원이 도입된다.[“인간은 봉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주체성(위인이 아닌 아무나의 주체성)은 봉기에 의해서만 역사에 도입되고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 “넘어설 수 없는 법, 제한 없는 권리”를 정당화해주는 것도 바로 이 필수불가결한 반란이다.[『안전, 영토, 인구』, 506쪽.]
벌떼 같이 일어서는 이들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봉기가 몇몇 위인들의 지도와 사목의 뒤를 따를 때 통치의 이성은 봉기를 집계하고 계산함으로써 예측한다. 이란의 푸코에게 봉기의 주체는 위인이 아니라 ‘아무나’이다. 그 익명적 영성의 힘은 목자들의 통치이성을 초월하며, 그 초월을 통해 자유와 배려의 통치성이 관장하는 역사의 진행을 정지시킨다. 절대적 불복종의 무한한 권리가 바로 그 신성한 봉기에 의해 정당화된다. 1968년 5월 튀니지의 학생파업이 절대적 희생의 욕구와 능력과 가능성에 의해 추동된 것이며 그 밑바탕에 신화와 영성의 힘이 있었다고 회고하는 푸코는, 1975년 10월 브라질 상 파울로의 한 성당 광장에서 있었던 거대한 추모미사를 잊지 않고 있다. 무장 경찰과 사복형사들이 깔려 있는 광장으로 붉은 사제복을 입은 추기경이 들어온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유태인 기자가 죽었고, 누구도 나서서 그 죽음을 기릴 수 없었다. 광장을 꽉 메웠던 아무나의 주체들, 그 추모의 침묵 속에서 푸코는 이렇게 쓴다. “경찰은 뒤로 물러섰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장엄하고 강렬한 광경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가 내리누르고 있었다.”[디디에 에리봉,『미셸 푸코』(下), 박정자 옮김, 시각과 언어, 1995, 197쪽.] 내치를 정지시키는 거대한 역사의 하중. 그것은 ‘파국의 짐’에 다름 아니다. 파국의 임재, 사목에 대항하는 미사의 폭력.
“게발트에 의해서만, 요컨대 사실상의 독재에 의해서만”
총리와 각료들은 수다를 나누는 저희들의 그 방이야말로 의회보다 더 집약적으로 민주주의의 힘을 대표한다고 믿는다. 총리는 민주주의로 충만한 그 방에서, 문지기들이 끝없이 도열해 서있는 그 법의 방 안에서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은 사방을 둘러싸고 엄중히 차단하고 분할한다는 것이다. 그 분할의 정치는 법의 적용과 집행과 효력을 독점하기 위해 법을 정지시키고 무력화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구한다. 이때 법의 정지 혹은 법의 공백은 정상적 상태를 지탱하는 규범과 질서를 바로잡고 옹립하는 힘으로 드러난다. 법의 공백이 법의 힘으로 나타나는 이율배반과 배리 속에서 계엄이라는 예외는 “법이 생명에 가닿고 스스로를 효력 정지시켜 생명을 포섭하기 위한 근원적 장치”로 기능하며, 예외라는 장치는 “살아 있는 자를 법에 묶는 동시에 법으로부터 내버리는 관계”[조르조 아감벤,『예외상태』, 김항 옮김, 새물결, 2009, 14쪽.]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법이 정지된 예외상태 속에서 법은 살아있는 삶을 직접 겨냥할 수 있게 된다. 예외는 법과 생명을 오차없이 맞닿게 하는, 또는 법이 삶을 에누리 없이 인도하고 사목할 수 있게 하는 오늘의 통치의 조건이며 토대이다. 예외는 삶을 법 안으로 포함하고 포획하면서 동시에 법 밖으로 추방하고 배제한다. 법의 안과 밖이 식별 불가능해진 통치의 장 속에서 삶은 법을 설립하고 보존하는 단일하고 단순한 기능적 삶을 할당받는다.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전기라는 기능을, 이른바 ‘단순한 삶’을.
그런데 사라마구가 말하는 계엄의 이면이란 이런 것이어서 눈 비비며 보게 된다. “정부는 포위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포위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빛』, 89) 포위하고 분할하는 계엄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포위되고 깨지는가. 느낌과 의지를 미리 결정짓는 합의의 명령구조를 따르지 않을 권리, 그 불복종의 권리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자들에 의해 포위되고 깨진다. 사라마구가 백지 하나하나를 두고 다이너마이트라고 쓸 때, 쟁여진 폭탄의 뇌관 같은 백지들 앞에서 총리는 다시 한 번 결단했었다. 민주적 정상상태의 회복과 복구를 위해 정부를 다른 도시로 이전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들을 선출한 수도의 시민들을 나몰라라며 죽게 내버려두는 것. 그런 한에서 총리의 결단은 ‘생명관리정치’의 운용을 애써 숨기려거나 꾸미려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알려진 것처럼 통계적 센서스(census, 인구 및 국세조사)에 기초한 생명관리정치는 출산과 질병과 사망의 증감률을 국민의료, 평균수명, 방역체계, 백신관리, 건강보험, 연금, 최저생계 같은 복지적 외양을 띤 기술을 통해 관리하고 조절함으로써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서 출현했다. 수도가 아닌 곳의 합법적 표들은 살게/더 살게 하고, 수도의 백지들이라는 화염은 죽게/꺼지게 내버려두는 권력. 총리의 수도 이전은 그렇게 ‘삶’을 집합적 인구 개념으로 환치한 위에 덧씌워놓은 복지적 안전의 환상을, 그 상냥한 기술의 기름기와 화장기를 싹 걷어치움으로써 지배의 맨살을, 통치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총리 자신의 결단이라는 것이 법 안에서 살게 북돋고 법 밖에서 죽도록 내버리는 권력에 철저하게 봉헌되고 봉인된 것임을 인구 전체에 고스란히 폭로하고 누설한다. 총리 스스로가 생명정치적 주권의 실상을 모조리 까발리는 순간의 현현. 백지라는 불복종의 신성한 게발트는 주권자의 자기폭로로, 달리 말해 주권자 스스로 자신 안에 장착한 자폭의 계기로, 주권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지시키는 자멸과 절멸의 계기로 작동한다. 백지가 폭탄이라면 그래서 폭탄인 것이다. 투표함에 백지라는 신성의 폭발물을 장치함으로써 권력에 의해 관리되는 인구는 계산 불가능한 ‘삶’으로 변신한다. 그런 변신의 과정/소송이 법과 생명의 연결고리를 작동 중지시킨다. 그럼으로써 법의 주인은 누구인지를, 법의 힘은 무엇인지를, 다시 말해 법의 벡터는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진정한 정치를 수행한다.
총리는 수도를 버렸고 수도는 초소들에 둘러싸였다.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던 내무장관은 수도의 시장을 만나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시의회와 행정이 이런 비상시에 방관만 해선 안 된다는 장관의 말에 같은 여당 소속의 시장은 망설임 없이 답한다. 시민들과 벌이는 전쟁의 도구로 시의회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내각의 지시와 간섭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결코 유혈의 폭력을 행사하는 정부의 공모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 장관은 고압적으로 말한다. 시의회도 결국 이 국가의 일부일 뿐이라고. 시장은 되받는다. 그렇지 않다고, 시의회는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속한다고. 장관의 신념과 시장의 의지는 그렇게 결렬됨으로써 적대로 돌아선다. 시장의 돌연한 변신은 무엇인가, 아니 시장은 누구인가. 시장은 바로 그날 투표함에 백지를 넣었던 자였다.
법을 설립하고 보존하는 힘을 사이에 두고 그 힘을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경합하면서도 공모하는, 끝내 합의된 합작을 통해 그 힘을 분점함으로써 현상을 질기도록 유지하는 장치의 네트워크. 이를 찢고 쪼개는 것이 바로 백지들이다. 백지들은 법의 힘을 둘러싼 안락한 경합과 치명타를 날리지 않는 알력과 버젓이 눈뜨고도 코 베인 줄 모르도록 하는 저들의 합의를, 바로 힘의 그 분점 상태를 불신임함으로써 정지시킨다. 백지는 어떤 빛이었다. “백지투표를 던진 사람들이 누군가 보게 되기를 바라는 빛”(『빛』, 143), 도망치는 도로 위의 정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바로 그 빛, 총리가 말하는 합법적 일치의 태양을 꺼트리는 신성한 게발트의 빛. 그 빛은 그들의 분점이 그들의 독점임을 백일하(白日下)에 폭로한다. 그런 한에서 그 빛은 각성과 계시의 빛이다. 시장은 그 빛들의 향연에 동참하고 있다. 사라마구는 앞길이 보장된 여당의 신뢰와 주식시장의 훈풍, 승인된 전통과 질서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듣던 시장이 계시에 마음을 열었다는 것, 이 도시의 부드러운 반역 뒤에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표명했다는 것”(『빛』, 144)에 감사한다. 백지는 눈뜬 자들의 의지이자 표현이다. 시장은 눈뜬 자다. 백지라는 불복종적 게발트의 빛은 감은 두 눈을 뜨게 하면서 눈뜬 자로 하여금 자신의 그 눈뜸을 낯설고 아찔하게 지속하도록 촉구한다.
그런 지속을 위해, 최고도의 지속을 위해 이렇게 묻고 답하자. 무엇에 의해서만 그들은 눈뜰 수 있었는가. ‘게발트라는 독재’에 의해서만. 제 갈 길을 뚝심으로 걷고 있는 엥겔스의 한 구절을 폭력적으로 절취해서 반복한다. “게발트에 의해서만, 요컨대 사실상의 독재에 의해서만”.[프리드리히 엥겔스,『역사에서 게발트가 행한 역할』, 이재원 옮김(에티엔 발리바르,『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난장, 2012에 수록), 183쪽.]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엥겔스는 뒤링이 정치경제학적 사고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켰던 것에 대해, 그런 뒤링의 이론이 당대를 석권하고 있었던 상황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반박하면서 게발트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제시했다. 이를 비스마르크의 성공과 한계에 적용시킴으로써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의 역사철학적 정당성을 옹립하려고 했던 것이『역사에서 게발트가 행한 역할』(1888)이었다. 당대 독일의 부르주아들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개의 기획을 함께 요구함으로써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계급의 이윤을 위해서는 상이한 규제와 경계들이 말끔히 철폐된 매끄러운 통합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런 공간을 마련해줄 정당과 그 정당에서 임명한 장관의 힘을, 다시 말해 대의민주주의적 법의 집행력을 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대의의 비용과 비효율적 운용을 단번에 정지시킬 수 있는 비스마르크의 게발트 수행을, 다시 말해 ‘사실상의 독재’를 또한 원했다.
엥겔스는 당대의 부르주아들이 두 개의 요구 중 그 어느 것도 성취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프로이센 중심의 군사주의로 드러나는 비스마르크의 독재와 결단을 역사를 진보시키는 힘으로 긍정한다. 그 힘을 통해 엥겔스는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적 의회주의를 부수려 한다. 엥겔스 독자로서의 발리바르에 따르면 엥겔스의 자유주의 비판의 힘과 근거는 비스마르크의 독재가 혁명의 목적과 수단을 긴밀하게 결합시켰던 데에 있다. 엥겔스에게 결단에 근거한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는 부르주아지의 이윤이라는 절대적 노모스를 보존하고 돌보는 대의민주주의의 법적이고 도덕적인 자기기만을, 그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반동성을 폭로하고 개시하는 힘이었다. 이 힘은 비스마르크가 설정한(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엥겔스 또한 이월 받았다고 해야 할) 혁명의 목적, 다시 말해 분열과 분쟁으로 인해 늦어진 근대적 국민국가로서의 통일 독일 건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맞닿아 있다. 국가 건설이라는 혁명의 목적은 언제든 선포 가능한 잠재적 예외상태 속에서의 반대의제적 수단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 비스마르크가 끝내 자신이 가진 역사의 추동력으로서의 위상을 져버리고 융커로 대변되는 구시대적 지주계급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마감되고 말았을 때, 엥겔스는 비스마르크의 독재를 구조적으로 더 철저하게 반복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역사를 진보시키는 강철기관차로 등장시키려 한다. 발리바르의 칼날이 내리박히는 곳이 바로 거기다.
게발트의 의미와 적용 조건을 규정하는 기준은 ‘역사의 의미/방향sens’이다. 문제는 보편사를 ‘가속’시키기 위해서든 ‘장애물’을 만들기 위해서든, 어떻게 폭력과 권력이 보편사의 과정에 개입하는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에게] 이런 의미/방향 자체는 게발트의 형태들에 대한 선험적 위계화를 통해 정의된다.[발리바르,『폭력과 시민다움』, 26쪽.]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맹목과 당착에 대한 성찰 속에서 발리바르는 노동자당 중심의 국가체계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엥겔스의 역사철학적 기획이 게발트의 다양한 질에 대한 선험적 위계화의 산물들이라고 비판한다. 파괴적이거나 구성적인 힘들 일반, 폭력, 권력, 제헌력, 제도적 권위, 합법성, 정당성 등 서로 겹치면서도 서로 환원되지 않는 게발트라는 단어의 애매성과 비규정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발리바르에게 게발트는 그 어떤 정치 행위로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모든 정치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구성요소였다. 그런 게발트에 대한 엥겔스의 위계적 인식이란 어떤 것인가. 다시 물어 엥겔스가 게발트의 잠재성 속에서 적출하는 힘의 방향과 강도는 어떤 것인가.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한 파괴적이고 제헌적인 힘, 그 힘이야말로 인류적 보편사를 발전시키는 필연적 동력이라는 신념, 그 같은 국민국가와 보편사의 함수관계를 합리적이고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통어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게발트/독재.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정치에는 두 개의 결정적인 역량만이 존재한다. 조직화된 국가게발트인 군대, 그리고 미조직된 인민 대중의 기초적 게발트.”[엥겔스,『역사에서 게발트가 행한 역할』, 183쪽.] 발리바르는 엥겔스의 이분법적 위계 속에서 미조직된 인민은 진보적 힘의 담당자인 상위의 국가가 건네는 바통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이어달리기의 연쇄고리에 대해, 보편사의 필연적 바통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설명하기 위해 썼던 발리바르의 한 구절을 설명이 아니라 변신을 위해 전용함으로써 엥겔스의 게발트론을 전유하고 전위시키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국가를 향한 인민의 무한한 수렴 과정, 그 국민국가적 인식틀의 역사적 패착을 재인식하며 썼던 ‘게발트를 넘어서는 게발트’라는 발리바르의 한 구절이 그것이다.
전위되는 “역사의 산파”
미조직된 기초적 게발트에서 조직화된 국가게발트로. 이 이행의 과정, 다시 말해 ‘지양’의 필연적 진행 속에서 게발트가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전환되고 치환되는 과정이야말로 엥겔스가 생각하는 보편사적 발전의 과정이다. 미조직된 게발트가 기관차로서의 노동자계급의 등장을 표현하는 데는 필수였지만 정작 엥겔스 자신의 정당적 전망과는 모순된다는 발리바르의 생각을 다르게 밀고나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엥겔스에게 발전을 위한 지양의 계기로만 인지됐던 ‘미조직된’ 게발트는 엥겔스 자신이 기획한 노동자당 중심의 보편사적 발전과정 전체를, 그 단단한 합법칙적 진보의 전망 전체를 대기 중으로 녹여버리는 힘일 수 있다. 미조직된 게발트란 미리부터 완전성의 정점으로 전제된 조직적 국가게발트에 의해 기어코 완비되고 부양되어야만 하는 어떤 결여태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미조직된 대중의 게발트는 국가 건설이라는 혁명의 목적에 따라 엥겔스가 부여하고 할당한 위상과 역할을 배반하고 초과하며 범람한다고. 그런 한에서 미조직된 게발트는 엥겔스 자신의 역사철학적 정당성을 지탱하는 대표/대의의 구조를 이미 그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힘이라고. 이 힘을 따를 때, 게발트를 한정하는 엥겔스의 ‘기초적’이라는 용어 또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적 재료나 소여가 아니라, 그 목적의 관철을 보장하는 수단으로서의 대의의 폭력성을 기각하는 새로운 제헌적 잠재성을 가리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엥겔스에게조차 그것은 이미 어떤 메시아적 힘의 표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게발트는 역사에서 또 다른 역할, 즉 혁명적 역할을 한다는 것, (맑스의 말에 따르면) 게발트는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라는 것, 게발트는 사회적 운동이 자신을 관철하며 굳고 마비된 정치적 형태를 파괴하는 도구라는 것―뒤링씨에게는 이런 언급을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엥겔스,『역사에서 게발트가 행한 역할』, 174쪽.]
‘역사의 산파’는 마르크스의 용어다. 게발트에 대한 통합의 필요성과 계산불가능성 사이의 긴장으로 채워져 있는 마르크스의 그 용어를 엥겔스는 자신의 역사철학적 기획을 보증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대패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마비되고 낡은 사회 속에 잉태되고 있던 ‘새로운 사회’를 변증법적 지양의 과정 위에서 출생시키는 산파로서의 게발트. 이런 엥겔스의 게발트는 그러나 마르크스의 긴장을 해소해버린 끝에, 미조직된 개인들을 합리화된 대중으로 견인/사목한 끝에, 산파를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어떤 젠더적 전치 끝에 가능해진 게발트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미조직되고 기초적인 게발트를 대의제 국가를 통한 보편사적 발전의 계기 속에 종속시키고 유폐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게발트다. 앞서 엥겔스의 ‘미조직적/기초적’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하려 했던 의지의 연장선상에서 엥겔스가 전유한 역사의 산파를 다시 전유할 필요가 있다. 구세계를 설립하고 보존했던 법의 네트워크를 파괴함과 동시에 그 안에서 잉태되고 있던 신생의 요소에 빛을 비추는 진정한 힘으로서의 역사의 산파, 메시아적 게발트. 이는 역사를 추동하는 게발트의 일차적 요소를 “매개되는 것”[엥겔스,『반뒤링론』,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186쪽. 강조는 엥겔스.]으로 보는 엥겔스의 의지와 목적을 중지시킨다. 풀어 말해 메시아적 게발트는, 근대적 군함에 토대를 둔 바다에서의 정치적 권력이 금속공학의 발달, 숙련 기술의 진보, 탄광의 높은 생산성이라는 경제력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었듯, 근대 국가에 기초한 ‘삶’에 있어서의 정치적 권력이 대의제라는 제도적이고 물적인 표상에 의해 ‘대표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엥겔스의 보편사적 필연의 왕국을 정지시킨다. 이 정지상태 속에서, 과학적 유물론의 홈 패인 길을 따라 배치된 엥겔스 게발트론의 핵심 용어들―순간, 도래, 거역, 의지, 기계, 전도, 폭파, 몰락―은 오늘의 신성국가 안에 이의를 틈입시키는 오래된 새 무기로 변신한다. 엥겔스는 국민개병제가 모든 인민에게 무기 사용법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사령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국가의 군대에서 인민의 군대로 바뀌게 될 ‘순간’이 ‘도래’할 거라고 적었다. 그 순간이란 거역의 ‘의지’를 갖게 되자마자 도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 ‘기계’로서의 인민 대중은 말을 듣지 않게 되며 군국주의는 자신의 발전 논리를 따라 스스로 ‘몰락’하고 내부로부터 ‘폭파’된다. 어디까지나 엥겔스는 근대적 군사장치의 매개를 통해 전개될 수 있는 힘의 관계를 사고하는 중이다. 그런 한에서 엥겔스가 말하는 거역 혹은 불복종은 국가게발트에 매개된 불복종이며 국가게발트 속으로 내부화하는 불복종이다. 여기서도 인민은 국가의 사목적 바통을 건네받으며 이어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이어달리기 속에서는 군사장치와 그것의 힘으로 지탱되는 국가게발트가 스스로를 끝내는 최종적 모순을 생산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순을 먹고 자라는 탄력적이고도 유연한 국가게발트가 내부로부터 폭파되고 몰락하는 순간은 언제 도래하는가. 결핍과 결여 또는 단순한 재료와 소여로 인식되었던 미조직적이고 기초적인 게발트가 지양이 아니라 전위되는 과정/소송 속에서 도래한다. 달리 말해 저 백지투표의 메시아적 게발트로의 발생적 과정 속에서 파국의 시간은 도래한다. 뒤링은 게발트를 절대악, 원죄, 타락, 악마적 힘으로 보면서 그것이 역사 전체를 감염시키고 모든 법칙과 질서를 변형시켜 놓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뒤링의 말은 낯이 익다. 뒤링은 사라마구의 총리가 백지들을 두고 타락한 소돔의 절대악의 전염이라고 했던 말을 앞질러 하고 있다. 국가게발트의 매개와 대표에 뿌리박은 엥겔스의 뒤링 비판은 그런 매개와 대의의 정치를 끝내려는 사라마구의 총리 비판으로 전위되어야 한다. 기왕의 법을 끝내는 역사의 산파, 그 메시아적 게발트는 엥겔스의 매개의 정치 속에서는 사고될 수 없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묻고 다시 답해야 한다. 낡은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는 무엇에 의해서만 빛을 볼 수 있는가. 게발트에 의해서만, 요컨대 사실상의 독재에 의해서만. 백지들이라는 역사의 산파에 의해서만, 요컨대 불복종이라는 메시아적 게발트에 의해서만.
침묵의 폭력
수도를 옮긴 직후 내무장관은 지하철역 하나를 폭파하는 테러를 자행했고 34명이 숨졌다. 시신의 소유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유가족들은 테러가 백지투표 봉기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시신을 주민들의 공동체에 넘길 수 없었다. 불에 타고 그을린, 그래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나머지 주검들은 수도의 주민들에 의해 폭력의 현장 맞은편에 안장되었다. 그들이 묻힌 바로 그 장소가 사건의 이정표로 남을 것이었다. 누군가 비애의 연설을 하려 했지만 거절되었다. 죽음의 대의는 죽음의 소각이었기 때문이다. 주검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자신들의 죽음을 앞세우거나 동원하지 말고 가만히 놔두는 것일 거라고 주민들은 생각했다.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죽음. “이 죽은 자들, 그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라면,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 오직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빛』, 177). 죽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죽음은 그 죽음에서 공통의 존엄을 경험하는 자들의 것이다.
죽음을 함께 짊어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으레 있기 마련인 구호 하나 피켓 하나 없었다. 인형을 태우거나 목청껏 혁명가를 부르지도 않았다. 돌이 날지 않았으므로 창문 한 장 깨지지 않았다. 총리공관으로 쓰이던 18세기말의 부르주아 저택 앞에 이르러 사람들은 정지했고 입을 다문 채 고요히 섰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침묵함으로써 분노한 폭도들의 본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길 바랐던 정부와 언론의 의지는 꺾여나갔다. 통치자들의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위협적인 전율”(『빛』, 184). 그것이 바로 침묵의 힘, 침묵의 폭력이었다. 침묵은 미결정의 언어이다. 미결정적이므로 잠재적이고, 그러므로 계산되지 않는다. 침묵은 그래서 막대하다. 침묵은 사목에 대항한다. 마리아-컬름 사원 제단에 새겨져 있던 한 문장,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를 제사로 인용하고선 침묵에 대한 심원한 깊이에 도달했던 이는 막스 피카르트였다.
피카르트에게 침묵은 능동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며 인간을 형성하는 신성한 힘이었다. 침묵은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언가를 목표하지 않는다. 침묵은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고, 그런 한에서 침묵은 무목적적이다. 침묵은 목적을 위한 효용과 효율을 배격하며 활용이나 이용을 거절한다. 그것은 축적을 위한 사용 일반을 거절한다. “무목적적인 침묵은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 곁에 갑자기 나타나서, 그 무목적성으로써 놀라게 만들고 목적 지향적인 것의 흐름을 중단시킨다. (…) 침묵은 사물들을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현존재의 세계로 되돌려보냄으로써 사물들을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물들에게 성스러운 무효용성(無效用性)을 준다.”[막스 피카르트,『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 까치, 1985, 21쪽.] 침묵은 목적으로 흘러가는 사목의 흐름 안으로 갑자기 틈입함으로써 그 흐름을 정지시키는 발생적 힘이다. 침묵이라는 성스러운 무효용성의 힘에 의해 효용의 세계, 다시 말해 분할을 통한 이윤의 노모스는 부수어진다. 침묵의 신성한 게발트가 ‘거대한 소음의 기계장치’에 항거한다. 피카르트는 ‘침묵을 창조하라’는 키에르케고르의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책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침묵의 게발트를 창조했던 저들 침묵의 시위대 속에는 계시에 마음을 열고 내무장관과 맞섰던 여당의 시장도 있었다. 그 또한 침묵의 무효용으로 총리공관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신성한 사람들 속에, 효율의 세계로부터 스스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되돌려진 바로 그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는 누가 이 시위를 기획하고 주동했느냐는 언론의 물음에 ‘모두이기도 하고 아무도 아니기도’하다고 답한다. 침묵하는 ‘아무나’의 주체성, 이 신성한 익명성의 힘이 사목의 어깨를 내리치는 파국의 게발트를 규정짓는다. 압축되어 있는 아래 한 장의 이미지를 읽자.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속의 가면은 1605년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36베럴의 화약으로 날려버리려 했던 가톨릭 혁명 단체의 맹원 가이 포크스의 얼굴이다. 영화는 밀고로 미수에 그친 그 사건의 핵심 인물을 2040년 영국의 제도 정치 속에서 다시 정의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딴 독재자 아담 셔틀러는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에 의한 생리학적 정신적 무질서, 예상할 수 없는 테러의 위협, 피부색과 정치적 입장과 성적 취향의 차이가 가져오는 혐오의 준동을 통해 통치한다. 영국의 성 조지 십자가를 나치 갈고리십자가의 원천 중 하나인 로젠 십자가로 바꾼 연단에서, 그 쏟아지는 기립의 갈채 속에서 셔틀러는 ‘하나된 국민’과 ‘하나된 조국’에 대해 열렬히 연설한다. 그 흥분된 달콤한 공포제 속에서 사람들은 울타리 안의 양들처럼 안락과 평온을 느끼며 산다. 각자가 삶의 그런 가상을 찢고 봉기할 수 있도록 먼저 박차고 나섰던 이가 바로 ‘브이’다. 가면을 쓰고 1605년의 의지를 함께 생환시켰던 자,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의 비를 맞게 했던 자. 그 비란 무엇인가. ‘빗속에 신이 있어요.’라는 여주인공 ‘이비’의 대사 속에서 범람하고 있는 바로 그 비다. 신의 비, 신성의 스며듦. 위의 한 장면은 신의 파편으로서의 비를 맞은 저들 익명의 가면들이 셔틀러의 통치를 통째로 불신임함과 동시에 법의 새로운 벡터를 설정하려는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브이는 누구인가. 이비는 익명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또 어머니였고, 나의 동생이었고, 당신이었고, 나였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였어요.’ 단지 흑인일 뿐인 흑인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노예가 되고, 광인일 뿐인 광인이 특정한 배치 속에서 정신병자가 된다고 했을 때 브이는 어떤 관계 속에서 무엇이 되는가. 브이는 브이다, 그는 익명적 불복종의 네트워크 속에서 신성의 제헌력(制憲力)으로 구성된다. 셔틀러가 하나의 국민국가를 외쳤던 것처럼, 사라마구의 총리 또한 내각의 갈채 속에서 비장하게 말한다. “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의지, 하나의 계획, 하나의 길.”(『빛』, 230) 일치의 태양을 꺼뜨리는 브이는 누구인가. 사라마구는 답한다. 브이는 백지들이다.
총리의 “씨발”, 환대의 효과
침묵의 봉기 이후, 백지를 투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겁에 질렸고 계엄군에 의해 엄중하게 봉쇄되어 있던 수도를 탈출하려 한다. 총리에겐 아기자기하게 싸우며 공존하는 합법정당들을 지지하는 그들의 표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애국자이든 민주제도 방어의 선봉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탈출을 거들고 도우라는 총리의 명령에 국방장관은 누구도 수도의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들이대며 반대했다. ‘백지 전염병’을 퍼트리는 불순분자들이 수도를 넘어 전국으로 퍼질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비하고 있냐는 국방장관의 날선 질문에 총리는 답하지 못했다.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총리는 속으로 자신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따르지 않는 그를 통치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자라며 괘씸히 여겼다. 총리는 때때로 고집을 피우면서 의견을 굽히지 않았던 내무장관의 중재안을 수용했고, 그것은 탈출하는 사람들의 자동차 안으로 정부의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백지들 모르게 야음을 틈타 짐을 꾸린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수도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내무장관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무장관은 수도를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했고 탈출자들을 부패하지 않는 법의 옹호자로 호명했다. 수도라는 소돔으로 차를 되돌리기를, 돌아가 민주주의라는 법을 지키는 열렬한 투사가 되기를, 탈출자들에게 이를 갈던 백지들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 훼손된 질서를 바로잡기를, 저항의 요새를 끝까지 지키기를, 그것이 정부의 단호한 입장이라는 것을 전달했다. 헬기로 탈출의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던 방송국 리포터는 차들이 유턴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감격에 찬 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생중계되고 있던 그 화면과 그 멘트 속에서 정부의 통치술에 의해 다시 한 번 내버려진 사람들은 법을 보존하는 영웅들의 회귀로, 의기양양한 발키리의 귀환으로 재현되었다. 그 리포터는 백주대낮에 벌어질 백지들과 탈출자들 간의 비극적 유혈충돌을 예감하며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떠났다가 돌아온 탈출자들은 백지를 투표했던 사람들과 아래 한 대목 속에서 만나고 있다. 총리는 입맛을 다시며 그들의 만남을 TV화면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나누었다. 이어 별 소동 없이 차에 실었던 물건들을 건물 안으로 날랐다. 비가 오는 컴컴한 밤을 틈타 밖으로 날랐던 것들을 훤한 대낮에 안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씨발, 총리가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빛』, 215)
가련한 총리, 안쓰러운 주권자. 부지불식간에 나온 욕은 사태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부정일 텐데, 그것이 가련한 이유는 단번에 부정했던 것이 실은 전혀 부정되지 않은 채로 드세게 되돌아옴을 확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총리의 즉각적 부정은 눈앞의 사태가 끝내 부정되지 않을 사건의 지속임을 반증한다. 총리의 ‘씨발’은 그 영원한 사건 앞에서 전혀 손쓸 수 없는 무기력과 허탈을, 쪼그라든 자신의 불가항력적 왜소함을 드러낸다. 백지를 내지 않았고, 그래서 침묵의 봉기에 선뜻 참여하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봉쇄된 수도 안에 감금됐다고 느낀 사람들의 공포와 고민 앞에서 다시 묻게 된다. 총리의 씨발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환대’의 힘과 그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물어져야 한다. 백지를 투표했고 침묵의 게발트를 창조했던 익명의 사람들이 백지를 내지 않은 사람들의 그 불안과 떨림의 시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을 때, 그럼으로써 자기 삶의 과정 안에 타인의 트라우마를 견디고 지탱할 수 있는 어떤 준비태세가 갖춰졌음을 자타에게 확증하게 될 바로 그때, 이른바 환대는 성립한다. 환대는 우리를 북돋고 인도하는 목자들의 입에서 씨발과 같은 험한 말을 자기도 모르게 내뱉게 하는 치명적인 힘이어야 한다. 환대는 환대다, 그것은 봉기의 관계망 속에서 통치의 경제를 중지시키는 힘이 된다. 환대는 유물론적 변신의 힘이며, 동시에 어떤 이웃의 정치신학이다. 무슨 말인가.
생각해보면, 나의 시간과 나의 경계를 내가 원치 않는 시간에 내가 원치 않는 공간에서 언제 어디서든 침범하는 것이 이웃이기도 하다. 신이란 그런 이웃을 통해 우리를 훼방하는 존재이며 우리는 그 이웃이라는 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썼던 건 카프카였다. 그것은 환대의 힘의 가능성에 대한 비극적인/궁극적인 실패와 좌초의 경험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웃이라는 신에 대해 무지할 때 이웃을 억압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고, 이웃이라는 신을 자신의 삶을 되비추는 자기 안의 거울로 삼지 않을 때 이웃은 쉬 억압된다고, 그래서 독일인은 유대인의 역사를 깊이 알려 하지 않는다고도 썼다. 이웃이라는 신은 이웃을 피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앎이란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언제 어디서든 신에게 송두리째 내놓아야만 하는 비용 위에서의 앎이다. 그 비용이 이윤과 목적을 위한 비용이 아니게 될 때, 다시 말해 타인을 알면 알수록 거듭되는 나의 붕괴와 잠식이 나를 다시 일으키고 다르게 채우는 약한 힘으로 전용될 그때, 환대의 유물론은 가까스로 두 발로 설 수 있는 게 아닐까. 바로 그때 환대는 총리의 입을 총리 자신도 모르게 씨발거리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환대는 타인에 대한 앎과 잠식되는 자기 사이의 곤혹스런 변증 속에 겨우 있거나, 아예 없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환대는 완결되지 않는 공통의 실험으로 지속되면서 매번의 실패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의 여지를 남기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공통의 실험을 푸코가 강의 도중에 언급했던 어떤 우정 안에서, 그 ‘상호복종’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신의 위치’에 놓고 서로에게 복종하기로 했다는 것,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를 높여 서로에게 고양된 자리를 선사하기로 약속했다는 것, 그 상호복종의 관계가 1380년까지 28년 간 지속됐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신으로 봉헌하는 관계의 계약. 그것은 일방적 양도의 권력관계를 찢는 상호적 양도이다. 그 상호복종의 양도론/환대론은 사목의 체계와 불화하는 불복종적 대항품행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통치권력의 관점에서 양도하고 양도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권력의 양도, 우리의 총리에게 그것은 독재다. 침묵과 환대의 봉기 앞에서 등뼈까지 떨리는 위협을 맞본 총리는 이제 사실상의 독재를 수행하고 있던 자신의 실질과 본모습을 수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그 실질에 덧입혀져 있던 민주주의적 외투를 찢어발긴다. 풀어 말해 총리는 내각회의라는 통치의 비효율 상태를 완전히 끝장냄으로써, 곧 국방장관 내무장관 법무장관으로부터 그 권리들을 합법적으로 이양받고 양도받음으로써 자신의 외양과 실질을 일치시킨다.
다시 말해서 총화 협동과 총화 집중이라는 것이지. (…)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복적 활동, 체제의 가장 민감한 기관인 의회 대의기구를 공격한 행동을 이겨낼 수 있다면, 나는 역사에서 영원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거요, 민주주의의 구원자로서 특별한 자리를 얻을 수 있단 말이오.(『빛』, 200)
민주주의를 옹립하기 위해 독재를 감행하는 총리. 헌법의 수호를 위해 헌법을 정지시키고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끝내는 역설. 총리가 말하는 ‘일치의 태양’과 ‘총화 집중’은 다른 말이 아니며 독재의 힘 안에서 합류한다. 총리에게 의회라는 대의장치는 체제의 존립에 있어 가장 예민한 고리이며 반드시 보존해야 할 최후/최고의 보루이다. 백지들의 힘을 매장하는 독재의 힘을 통해 총리는 민주주의의 구원자가 되려 한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로서의 총리, 총리라는 적그리스도. 총리는 “투표를 방탕하게 사용할 가능성”을 미리 예상하지 못함으로써 백지들의 봉기를 초래했다. 그는 “백지투표의 무절제한 사용이 민주체제의 작동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빛』, 128, 139)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런 한에서 백지들의 의미와 파장을 총리만큼 정확하게 이해하고 처절하게 체감하고 있는 이도 없다. 다시 묻자. 백지란 무엇인가. 합법정당에 투표할 수 있게 인가되고 훈련된, 이른바 민주적 참정권이라는 것을 방탕하게 낭비했던 것이 백지다. 소중한 한 표를 정상적인 정당에 찍지 않고 무절제하게 탕진하고 소진했던 것이 백지다. 줄여 말해, 백지들은 정치의 영역에서 수행된 ‘일반경제적’(바타이유) 사건이자 그 효과이다. 일반경제는 상품이나 사건, 생각, 의지, 의미 등의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생산과 흐름을 보존하고 보수하는 ‘제한경제’의 목적론적 체계 안에서, 그 체계의 한계를 규정하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소비 및 소진의 과정과 효과를 가리킨다. 국가이성 혹은 통치적 합리성은 제한경제적이다. 사목은 제한경제를 운용하는 힘의 속성 중 하나이다. 제한경제는 통치이성의 의미론적?실천적?절차적 합리성과 함께 움직인다. 불복종의 백지투표가 반사목적 대항품행의 질감을 띤 것인 한, 백지는 제한경제 안에서 제한경제의 한계를 초과?범람?이탈?위반하는 의지의 발생적 사건이다. 막대한 탕진으로서의 일반경제는 제한경제적 통치의 규모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통치 그 자체를 위협하고 중지시킨다. 합리적 축적이라는 제한경제의 목적을 쓸어버리고(蕩) 그치게 하는(盡) 백지들의 힘, 일반경제적 게발트.
메시아적 독재에 관하여
불복종의 게발트, 침묵의 폭력, 환대의 유물론, 탕진의 신성. 이렇게 나열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제 누가 어떻게 통치하는가. 메시아적인 것이 공통적으로 통치한다. 통치의 메시아성, 다시 말해 메시아적인 것의 진정한 독재. 그것은 새로운 법을 구성하고 창출하는 힘, 이른바 제헌권력에 의해 발생하고 전개된다.『독재론』(1921)의 저자 슈미트가 말하는 입법자는 그런 제헌의 힘과 사명이 무엇에 의해 정당화되고 증명되는지, 또는 어떻게 재인식되고 전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한 답변의 초입에 해당한다. 슈미트에게 루소의 입법자가 담당하는 사명과 그 법률적 지속성은 무엇에 의해 보증되는가. ‘인간화된 기적’에 의해, 곧 ‘위대한 영혼’의 행위에 의해 보증된다. 그런 한에서 사라마구의 백지들을 일단 입법자적 속성을 가졌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좀 더 나아간 곳에서 그 환원불가능함의 의미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슈미트는 이렇게 쓴다.
입법자는 국가 밖에 서 있지만 법 속에 있으며, 독재자는 법 밖에 서 있지만 국가 속에 있다. 입법자는 아직 구성되지 아니한 법에 불과하며, 독재자는 구성된 권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독재자의 권력을 입법자에게 부여하고, 독재자적 입법자, 헌법을 제정하는 독재자를 구성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결합이 주어지자마자 위임적 독재로부터 주권적 독재가 완성되는 것이다.[칼 슈미트,『독재론』, 김효전 옮김, 법원사, 1996, 163쪽.]
법을 기안하고 발안할 수 있는 입법자의 법은 아직 제정되지는 않았으므로 법적 권력을 갖지 못한, ‘권력 없는 법’이다. 입법자는 자신의 발의를 통해 잠재적으로 언제든 법을 구성할 수 있기에 법 속에 있지만, 아직 국가의 제정된 법이 된 것은 아니므로 국가 밖에 있다. 이에 반해 국가 안의 헌법에 기대어 선포된 법의 정지상태 위에서 구체적인 적(敵)을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들을 수행하는 위임독재는 법 바깥의 전권, ‘법 없는 권력’이다. 독재의 장소와 위상을 가리키는 비식별역이라는 단어의 내력은 위임독재가 법 밖에 있지만 국가 속에 있다는 말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입법자와 독재자가 결합할 때 위임독재에서 주권독재로의 이행이 완수된다는 것이다. 주권독재는 진정한 위임독재다. 입법자와 독재자가 결합함으로써 주권독재는 법의 안팎과 국가의 안팎 그 어디에든 있을 수 있게 된다. ‘진정한’이라는 말은 독재의 수행이 그렇게 어디서든 가능해졌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주권독재란 무엇인가. 편재하는 독재이다. 다시 말해 신적인 통치이다. 언제 어디서든 무제약적으로 적의 배제와 법의 구성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의 전면화이다. 입법자와 독재자를 결합시키는 힘이자 그 결합으로부터 발원하는 주권독재의 힘을 다르게 표현하는 말이 바로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이다. 사라마구의 백지들은 분명 입법자와 독재자의 결합으로서의 제헌권력의 현현이지만, 그것으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게 환원불가능한 백지들로 슈미트적 주권독재/제헌권력을 문제시하면서, 그 시선 속에서 메시아적 제헌의 가능성을 출산하기 위해서는 슈미트가 말하는 ‘갈채’에 이르러야 한다.
슈미트는 확립된 통치를 지탱하는 법적 관련, 곧 제정된 권력(pouvoir constitue)의 차단과 중지를 두고 기적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 기적과 제헌권력을 동렬에 놓고 함께 사고한다. “[제헌권력은] 헌법이 진정한 헌법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적 독재는 현행 헌법이 아니라 초래되어야 할 헌법에 근거하는 것이다.”[『독재론』, 172쪽.] 제헌권력은 현행의 모든 법들을 근거지우는 원인적인 힘, 이미 있던 법의 절멸과 새로운 법의 신생을 관장하는 힘이다. 슈미트에게 그것은 지금 당장의 헌법이 아니라 도래해야 할 헌법, “도래할 혁명적 독재”[『독재론』, 164쪽]에 근거한다. 제헌권력은 임재하는 신성에 뿌리내린 것이다. 그 힘에 의해 파국을 맞이해야 할 제정된 권력의 첫머리에 의회적 가치들의 계열이 있다. 다시 말해 의회와 상관적인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법치국가적 가치들이 바로 슈미트의 적이다. 그것들은 공공성의 외투를 입고 사적 이익과 권력을 분점하는 정당들의 원천이었다. 한없이 결정을 유보하는 ‘영원한 대화’의 낭만성과 그것에 결합된 공개성과 토론의 장. 의회는 통치의 이윤을 기다리는 대합실이었다. 슈미트에게 정치의 유일한 기준으로 남은 것은 저항할 수 없는 ‘인민의 의지’였다.
인민은 공법적 개념이다. 인민은 공공성의 영역에서만 존재한다. 1억의 사적인 개인들이 일치된 의견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인민의 의지가 아니며 여론도 아니다. 인민의 의지는 갈채(acclamatio), 즉 자명하고 부인되지 않는 현존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 독재적이거나 무단적인(카이사르주의적인) 방법은 인민의 갈채에 의해 지지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실질과 힘의 직접적인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칼 슈미트,『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나종석 옮김, 길, 2012, 37쪽.]
공공의 힘으로서의 인민의 의지를 가리키는 ‘갈채’란 무엇인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동일성들을 파괴하거나 쇄신하는 직접적인 힘이다. 통치하는 자와 통치당하는 자의 동일성, 인민과 그 대표의 동일성, 국가와 인민, 국가와 법률, 산술적 다수라는 양적인 것과 법률의 정당성이라는 질적인 것의 동일성. 이런 동일성들과 적대하는 갈채는 제헌하는 주권독재를 밑바닥에서부터 지지하는 힘이며 민주주의적 실질을 의회적 가치들로부터 탈취하는 길이다. 대의하는 자들의 연막과 주술로부터 자명한, 그 사목적 대표들의 대의와 매개에 의한 견인을 거절하는 생생한 현존으로서의 갈채. 사라마구적 대항품행으로서의 백지투표는 분명 갈채의 한 양식이지만, 갈채로 환원불가능하며 그렇게 환원되지 않는 잉여의 힘이 갈채의 의미를, 그 의지를 문제시하게 한다. 과연 갈채는 의회주의적 가치들의 연쇄를 온통 끝내고 인민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현현시키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갈채의 의지가 적대시하는 대의와 대표의 과정은 과연 갈채에 의해 완전히 거절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널리 알려진 다음과 같은 연쇄 때문이다. 갈채라는 인민의 공공적 의지, 그 의지의 승리를 재현한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1934), 그 승리의 ‘환호’에 화답하는 인도자 혹은 목자 히틀러, 그리고 학살. 슈미트가 갈채로 지탱되는 주권독재를 ‘진정한 위임’이라고 말할 때, 나아가 주권독재를 제헌권력의 ‘무조건의 행동위원’이라고 규정할 때, 인민의 권리와 의지는 끝내 폐기되지 않고 작동하는 위임과 위원이라는 대의의 과정 속으로 자발적이고도 합법적으로 양도되고 이양된다.
* 히틀러는 카메라와 함께 뚜껑 없는 벤츠에 올라타 있다. 달리는 차 위의 카메라는 『나의 투쟁』의 저자를 총통으로 선출한 베를린 시민들의 ‘환호’와 ‘갈채’를 촬영했다. 이 갈채에 온몸으로 화답하는 히틀러는 고양된 ‘세계정신’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켰을 것이다. 위의 한 장면은 뉘른베르크 나치전당대회 과정을 찍은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에 들어있던 것을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1955)에 인용해 놓은 것이다. 동일한 프레임에 담긴 상반된 정치적 의지와 그 효과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총통이라는 대표는 다른 그 어떤 대표와도 다를 것이라는 확신과 결단. 나치라는 대의의 과정은 다른 그 어떤 대의와도 완벽하게 다를 것이라는 판단과 기대. 배제하고 제거하려 했으며, 그럼으로써 적어도 회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의회주의적 가치의 계열은 바로 그런 믿음을 올라타고 더 은밀하고 강력한 힘으로 다시 복귀한다. 갈채는 의회의 위기를 틈타 의회를 결단코 장사지내려 했지만, 끝내 갈채는 그런 의회와의 연루의 산물이라고 해야 한다. 벗어나려는 의지적 힘이 다시 말려들도록 하는 불가항력적 힘의 원천이 되는 해체적 오염의 사태, ‘(탈)연루’의 상황. 그것이 갈채의 제헌권력을 한정짓는다. 불복종의 게발트로서의 백지들은 거듭 담금질된 위임과 양도라는 (탈)연루의 고리를 끊는 진정한 주권의 독재이다. 백지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수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발전사관에 대한 슈미트의 다음과 같은 비판을 히틀러의 독일정신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게끔 한다. “발전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전되고, 중단도 발전을 진척시키기 위해 발전의 부정으로서 발전에 봉사해야만 한다. (…) 세계사가 세계법정이라면 세계사는 최종심이 없는 그리고 최종의 선언적인 판결이 없는 과정(소송)이다.”[『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114쪽.] 진정한 주권독재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진보의 기관차를 정지시킨다. 그 정지의 힘마저도 발전의 동력으로 전치시키려는 한에서 권력화한 마르크스주의와 나치의 사회체계는 동렬에 놓인다. 백지는 최후의 심판을 끝없이 뒤로 유보시키고 지연시키는, 영원한 대화로 운용되는 세계법정과 그 거울들에 조종을 고지하는 힘이다. 끝없음에 끝남을 도래시키는 일, 도래할 제헌으로서의 메시아적 독재가 그 일을 한다.
다른 序: 좌초 이후
백지와 대결하기 위해 총리는 다시 한 번 결단한다. 자신의 안락한 세계를 둘러치고 있었던 가상을 찢어버리는 것이다. 4년 전 도시의 모든 이들이 눈멀었던 때, 그 혼돈과 무질서와 치욕과 상처들을 봉합하고 있던 가짜 정상상태라는 장막을 찢고서 시민과 자신에게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를 다시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그때의 고통이 오늘의 백지투표에 의해 재현되리라는 것을 각인시키려 했다. 총리는 그때 눈멀지 않았던 한 여성이 백지의 배후임을 지목한다. 그녀에게는 죄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와 무죄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수사의 책임을 맡은 경정은 그녀를 찾았고, 그녀가 죄가 없다는 것을, 그녀가 끝내 한 명의 이웃임을 깨닫는다. 이 각성의 파장은 총리의 체제 전체에 대한 불복종의 힘으로 뻗고 퍼진다. 모호했던 것들을 분명히 직시하게 된 경정에게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평생을 지켜야 할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빛』, 371) 이 불복종의 의지에 기대어 사라마구는 선포한다. 계약서를 찢는 사람들이 바위처럼 단단한 결론들을 고치고 있다고, “그 결론들은 이제 그것을 만지는 손가락들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있다[고].”(『빛』, 412)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누구보다 예민하게 총리는 백지들에서 한 정치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본다. 총리에게 백지는 대의제를 지탱하는 투표과정 그 자체를 파멸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씨앗들’이었다. 그 씨앗은 선거라는 정상적 절차의 온실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길러진 비수였다. 자신만만한 내무장관은 말했었다. 조직된 합법적 폭력의 사용권을 독점한 국가는 결코 그 비수들과의 칼부림에서 지지 않는다고, 진다면 세상이 끝나버리게 될 것이므로 결코 질 수 없다고. 총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답한다. “아니면 세상이 시작될지도 모르지.”(『빛』, 172) 백지의 게발트에 의한 붕괴와 파국이 어쩌면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것. 총리는 우리의 제헌권력을 우리보다 더욱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총리는 우리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욱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당의 갱신과 대의의 쇄신이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그것이 지금 당장 실천 가능한 실효적 과업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누가 세상의 끝과 세계의 새로운 시작이 붕 뜬소리라고 말하는가. 누가 역사의 산파에서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무엇이 현실적이며 무엇이 관념적인가. 무엇이 과학적이며 무엇이 공상적인가. 확실한 것은 총리에게, 사목되는 삶이 누리고 구가하는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동의 적인 바로 그 총리에게 백지들에 의한 대의장치의 파국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은 관념이나 공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총리에게 백지의 게발트는 리얼한 것이었다. 지상과의 고리를 잃은 천상의 노래가 아니라 지상에서 관철되는 지고한 의지의 효과였다. 우리가 총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 거듭 제기되어야 할 근본적 입장들 중 하나일 것이다.
메시아적인 것, 숨은 이맘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란인들의 지고한 정치를 르포라는 절박함의 형식 속에서 옹호하고 보강하며 유통시키려했던 푸코를 다시 생각한다. 호메이니의 집권 이후 좌우파로부터 터져 나온 비난들이 있었고, 그런 비난들에 대한 푸코의 선언적 응답이「봉기는 무용한가」였다. 그 선언 전에, 아니 그 선언과 함께「불편함의 모랄을 위하여」(1979. 4. 23)가 있었다. 그 글에 대한 짧은 언급 속에 급진적 사고의 좌초 이후에 대한 어떤 태도의 요청이 있다. “그 글은 좌절된 소명감에 대한 고백이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채 확신을 수정하고 자신에게 충실한 채로 남아 있으면서 판단을 전환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의 토로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확신에 완전히 동의하지 말 것’을 충고하는 메를로-퐁티의 교훈을 매밀 매일 지켜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었다.”[디디에 에리봉,『미셸 푸코』(下), 165쪽.] 이 인용은 이제까지 했던 말들의 용법과 의미를 다시 확증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확신과 의지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신념을 밀고나가면서 확신을 수정하는 방법과 태도를 되씹기 위한 것이다. 불편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불편함이 급진성의 조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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