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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간 카메라 수리한 김학원

BUZZWeb 2009. 4. 7. 14:30

[Why] 그의 손이 닿자 고장난 카메라가 세상을 부라렸다
[박종인이 만난 외길인생] 42년간 카메라 수리한 김학원
"못 고치면 일자리 끝 무조건 뜯어가며 배우니
어느새 최고의 수리공 됐죠 품질이 생명… 하루 1대만 고쳐"
글·사진=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한 사진가가 말했다. "이 사람은 사진계의 보물이요, 비공인(非公認) 무형문화재다. 그가 없으면 우리는 어떡하나. 그래서 그런다. 힘들게 하루 종일 일하지 말고 쉬면서 건강 챙기라고."

 

'이 사람'은 김학원(56)이다. 서울 중부서 앞에서 카메라 수리점 '중앙카메라'를 운영하고 있다. 사망선고 받은 카메라가 초등학교만 나온 그의 손길 아래 부활해 세상을 보고 눈을 부라린다. "죽더라도 카메라 고쳐줄 그 두 손만은 무덤 위로 빼놓고 묻어야겠다"고 위협하는 사진가도 있다니….

 

"가방 끈도 짧은 저를 만나 뭘 들으시겠다고…." 인터뷰를 청했을 때 그가 한 대답이다. 사진가들과 '필름'을 못 잊는 동호인을 통해 그 수줍은 성품에 대해서는 들을 만큼 들은 터였다. 중원(中原)의 무명검객이 '강호의 은자(隱者)'를 만났을 때의 흥분을 느끼며 무작정 그의 작업실로 쳐들어갔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작은 건물 3층 작업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명품 카메라로 불리는 라이카(Leica) 보디와 렌즈들이 내장을 죄 토해내고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다. 김학원은 그 처참한 기계들을 하루에 한 대씩 구원한다.

 

 ▲ 작은 작업실에서 김학원이 카메라를 만진다. 가난에 쫓겨 시작된 카메라 수선공의 삶 40년 끝에 그는 명장(名匠)이 되었다.


"제 고향 경북 문경군 점촌면에는 라디오도 없었어요. 라디오 있는 집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안에 도대체 사람이 몇 명이야'라고 감탄하던 시절이죠." 7남매 낳고 살던 부모도 똑같이 가난했다. 둘째 김학원은 "당장 돈 안 되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신 손재주는 좋아 시계를 뜯었다 조립했다 하고 스스로 신기해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졸업한 그를 대전 사는 삼촌이 데려가 시계 점포에 취직시켰다.

 

1980년대까지도 시계상은 카메라상을 겸한 곳이 많았다. 김학원은 시계 점포 다락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어느 날 청소하다 보니까 주인 책상에 일제 카메라 하나가 낱낱이 분해돼 그릇 속에 담겨 있어요. 주인이 분해는 해놓고 조립할 엄두를 못 낸 거죠. 잠도 안 오고…."

 

밤새 카메라 부품들을 연결해 감쪽같이 카메라를 재조립해 놓았다. 작동은 되지 않았지만 다음 날 경악한 주인은 이후 카메라는 그냥 자기한테 맡겨버리더라고 했다.

 

1960, 70년대. 카메라는 가보(家寶) 1호였다. 베트남전 파병 전사들의 귀국 필수품이 일제 야시카 카메라였다. 고장 난 가보를 사람들이 내던질 리 없다. "부품 바꿔치지 않나 등 뒤에서 감시하는 겁니다. 뭘 알아도 남이 보면 신경이 쓰이는데 아는 게 없는 어린 놈이 감시 당하며 일하자니, 참."

 

그랬기에 그는 오히려 남보다 빨리 기계를 이해하게 됐다. 날 때부터 있었던 눈썰미와 손재주에 "못 고치면 일자리 끝"이라는 절박감이 어우러져 몇 년 사이 그는 대전에서 이름 날리는 카메라 수리공이 됐다.

 

 
▲ 김학원이 제작한 카메라 KH1. 설계도면도 없이 3년 동안 선반으로 쇠를 깎아 만들었다.


"그런데 세 끼 밥 주고 재워주면 끝인 거예요. 남도 다 그렇게 살았지만 너무 지겨워 고모가 사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죠." 일주일 만에 동대문에 있는 카메라가게에 자리를 얻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배운 게 없잖아요. 카메라에 대해 뭘 공부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으니까 무조건 뜯어가며 독학 했습니다. 기계라는 게 단순하잖아요. 회전운동 하거나, 왕복운동 하거나 다른 부품 고정하거나. 그 원리를 카메라를 보며 공부했어요."

 

숫자고 도면이고, 봐도 모르니 필요 없다. 오로지 경험이다. 회전할 거 회전하게 하고, 왕복할 거 왕복하게 해주면 기계가 살아났다. "이만큼만 고쳐주고 다음에 또 고쳐주지 하는 생각 들 때가 제일 싫었고 재수리 의뢰가 들어와 분해해보니 내가 틀렸을 때 너무 짜증이 났다"고 할 만큼 그는 카메라에 매달렸다.

 

그에게 오는 카메라들은 80년대 이전에 만든 구닥다리들이다. 라이카 M 시리즈, 렌즈 두 개인 롤라이플렉스, 중형카메라의 '로망' 핫셀블라드. 하나같이 사진 품질은 최고지만 낡은 기계다.

 

수리 의뢰가 들어오면 김학원은 필름 돌리개를 돌리고 셔터를 눌러본다. 손으로 느끼고 소리를 들어보면 "대충 문제가 어딘지 안다"고 했다. 진단 끝난 카메라들은 작업대 위에서 해부된다. 카메라 주인이 보면 기겁할 법하지만 김학원은 겁이 없다. 수만 번 저질러온 '창조를 위한 파괴'가 아닌가.

 

기름칠할 부품은 하나하나 기름칠하고 먼지 닦아내고 구하지 못할 부품은 선반으로 쇠를 깎아 만든다. 그리곤 재조립이다. 10년 전 김학원은 선반 하나를 사 독학으로 조작법을 익힌 뒤 부품을 제 손으로 깎아 만들고 있다. "아침에 작업 시작해 수선하고 조립 끝내면 다른 카메라 하나 분해할 시간이 남는다"고 했다. 그러니 하루 딱 한 대다.

 

카메라 도구 중에 렌즈 어댑터가 있다. 구경(口徑)이 다른 브랜드의 렌즈와 카메라를 연결하는 기구다. 이게 다른 카메라 점포에서는 5만원인데 '김학원표' 어댑터는 20만원이다.

 

그런데 이 어댑터 구하기가 무척 힘들다. "1㎜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다"는 평판에, 하루 한 대만 만들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가. 김학원은 "대충하는 꼴을 못 보는 성질 때문에" 그렇게밖에 되지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숱하게 카메라를 살리고도 그는 가난하다.

 

그는 1980년에 딱 1년 놀았다. "빨리 고쳐달라, 깎아달라는 사람들이 싫었어요. 나도 나름 전문가인데 불량품 만들라고 주문해대니. 어느 날 새 카메라 하나 사서 망치로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카메라가 싫어졌어요." 그런데 왜 다시 작업대 앞에 앉았을까. "이거라도 안 하면 굶어 죽으니까요."

 

김학원의 인생은 그리 되었다. 누가 점지해준 운명도 아니다. 한 달 전, 그는 카메라 한 대를 제작했다. 중형필름(일반 35㎜ 필름의 네 배 크기)을 쓰는 자그마한 카메라를 보고 한 손님이 'KH1'이라 명명했다. '김학원(K)이 수공(Hand made)으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1) 카메라'라는 뜻이다. 설계도도 없이 3년간 선반으로 깎아 만든, 라이카 M 시리즈 닮은 KH1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벅차 올랐다.

 

"…조목조목 창피한 인생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비 챙기는 기자에게 그가 박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창피하시다고? "스스로 평가할 때 대한민국에서 순위가 어느 정도이신지?" 명장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배운 게 없어서…."

  


* 출처 : 조선일보, 2008.06.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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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김윤양이 만든 13분짜리 단편 영화 KH1. 서울 충무로에서 카메라 수리상을 하는 김학원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KH1은 김학원씨가 손으로 만든 카메라의 이름이다.